과거를 찾아 길을 나섰다. 유년기를 보냈던 옛 동네 입구에 들어서니 가슴이 답답해 오는 걸 느꼈다. 결혼을 하고 술 한 잔 거나하게 되면 어린 시절 슬레이트집에서의 생활을 철 지난 레코드처럼 내뱉곤 했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같이 가보자고 한 것이다. 취업을 하여 독립을 할 때까지 완산칠봉을 벗어나지 못하고 산자락을 전전했다. 50년 전만 해도 완산칠봉 자락에는 무허가 집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여기저기 위태롭게 자리해 있었다. 지금은 산 중턱에 있는 동네들이 벽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관광명소가 되기도 하였지만 당시만 하여도 전쟁 후 피난민이 자리 잡은 빈민촌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여러 세대가 공동화장실을 이용하고,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집은 비바람만 간신히 막아주었으며, 덜컹거리는 함석 대문은 곧 떨어져 나갈 듯했다. 연탄 배달도 안 되고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아 수레나 물지게로 날라야만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보는 야경만큼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며 이렇게라도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고 하셨다. 그때의 열악한 환경은 어린 마음에 상처로 남아 오랫동안 아물지 않고 있었다. 아내가 그 트라우마를 지워주겠다며 손을 잡고 나섰다.
내가 살던 동네는 완산칠봉 내칠봉의 끝 봉우리인 용두봉 중턱이었다. 세월이 흘러 많이 변하였음에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옛 모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양로당을 거쳐 쌀집을 지나 올라가니 함께 살았던 동네 이웃들이 떠오르며 나의 방문을 반겨 주는 듯했다. 집들은 개축이 되어 그때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골목길만은 그대로 남아 기억을 찾아가는데 어렵지 않았다. 예전에 살던 집에 다다르니 옛집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 시내를 바라보니 예나 지금이나 도심의 풍경은 고풍스러웠다. 한 번은 과거의 내 모습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다시 찾아오는데 반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과거를 따라 여행을 계속했다. 용두봉에 올라 용머리고개를 내려다보니 아버지와 마주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만 해도 지역감정이 심하여 아버지가 경상도 출신인 아내와의 결혼을 반대하셨다. 아버지는 인사 온 아내와의 만남이 불편하셨는지 용두봉으로 자리를 피하였는데, 아내가 따라가서 끈질긴 설득으로 허락을 받았던 곳이다. 우리의 결혼이 서동요까지는 아니어도 경상도 여자와 전라도 남자의 만남이다 보니 당시만 해도 조금 극적이기는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신다면 그때 허락을 잘하였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 다행이다.
용두봉을 지나 백운봉, 무학봉까지 등선을 따라 걸었다. 맞은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걸어오는 청년이 보였다. 대학시절 시험에 계속 낙방하면서 괴롭고 힘들 때면 찾아와 답답한 마음을 달래던 능선 길이다. 특히 가을이 되면 길을 따라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들이 찢기고 멍든 상처를 어루만지듯 흔들리는 모습에 위로받곤 하였다. 옥녀봉으로 향하는 길 위에 넓게 자리 잡은 소바위가 있다. 옥녀봉에 오르는 급경사를 앞두고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다. 군 입대를 앞두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 같은 절망감에 처음 담배를 배웠던 곳이기에 남다른 곳이다. 아내와 같이 소바위에 앉아 완산칠봉이 젊은 시절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해 주었다. 곁에 있던 아내는 말없이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순간 완산칠봉에 갇혀 있던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완산칠봉에서 가장 높은 장군봉에 도착했다. 팔각정에 오르면 사방으로 탁 트인 전주 시내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손에 잡힐 듯한 전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아직 무더위가 물러가기 전이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람에 시원했다. 이제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데 조금은 덜 힘들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완산 꽃동산에 들렀다. 몇 해 전부터 겹벚꽃과 철쭉으로 유명해져 봄이 되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나도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매년 찾아오곤 한다. 지금은 철이 지나 꽃도 떨어지고 사람도 없어 한적하지만 꼬불꼬불 꽃밭을 따라 걷는 길이 여유롭고 나름 운치가 있었다.
약수터에 다다르니 왁자지껄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완산국민학교와 지척에 있어 어린 시절 특별한 놀이가 없던 아이들에게는 이곳만큼 재미있는 공간이 없었다. 점심시간이나 수업이 끝나 잠시라도 시간이 생기면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한걸음에 달려오곤 했다. 울창한 삼나무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숨바꼭질도 하고, 편을 나눠 총싸움과 말뚝박기를 하며 놀던 곳이다.
지금은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인근 산을 찾아다니지만, 예전에는 완산칠봉이 전주시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어 평일이나 주말에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건강을 위해 찾아오고, 젊은이들은 고단한 삶에 위안과 위로를 받기 위해 찾곤 했다. 칠성사와 정혜사가 자리하고 있어 조상과 자녀를 위한 기도를 하러 오는 불자들의 발길도 줄을 이었다. 이렇듯 완산칠봉은 오랜 세월 동안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며, 시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초입에 서서 완산칠봉을 올려다보니 나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싫어도 버릴 수 없는 과거의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완산칠봉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전주의 역사이면서 나의 역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