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에 미리 캐리어 4개 다 싸놓고 아침에 입을 옷 개어서 선반에 올려놓고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 챙겨놓고 충전기에 모두 꽂아 충전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새벽 2시에 잠들었다. 아침 7시 알람이 울리자 아이들을 깨워서 내려갈 준비를 시키고 7시 반에 조식당으로 출발!
오늘 조식의 메인은 맥도널드 맥모닝이 연상되는 잉글리시 머핀 샌드위치다. 마지막 조식을 양껏 먹고 방으로 와서 남은 짐들을 싸는데... 생각보다 많다...ㅠ 결국 이렇게 저렇게 주섬주섬 싸서 피난민처럼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왔는데 아침시간이라 그런지 만원이다. 그래도 슬쩍 삐집고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미처 안 왔는데 문이 닫혀버렸다. 안에서 어떡하냐고 다들 안타까워해서 뒤통수에 대고 잘 찾아올 거라고 쿨하게 대답했는데 역시나 잘 찾아온다. 우선 차에 가져간 짐을 싣고 차를 엘리베이터 입구로 후진시켜 최대한 가까이 갖다 대고 있으니 체크아웃하러 간 큰 딸이 왔다. 별 일 없었냐고 했더니 "AWSOM!" 이랬다며 미소 짓는다. 이 나라는 뭘 해도 AWSOM, FANTASTIC, PERFECT. 소소한 행동에도 하이파이브를 하며 저렇게 호응해주니 아이들은 얼마나 기분 좋을까. 별 수고스럽지 않은 말 한마디인데도 참 기분 좋고 어깨가 으슥해지니 말이다. 곧이어 둘째가 내려오고 둘째를 찾아 다시 올라갔다는 나머지 두 아이들도 도착하고 짐도 다 실은 채로 출발을 외쳤으나! 이미 시계는 8시 반이고 네비상으로 40분이 걸린단다.
첫날 지각을 안 하려고 그렇게 서둘렀는데 지각이구나... 싶은데 역시나 지각이 못마땅한 뒷좌석 막내의 조용하면서도 규칙적인 재촉이 시작됐다. 부지런히 달려서 학교에 도착했는데 주변이 공사 중이라 어수선한데다 주차장이 너무 멀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내려서 알아서 찾아가라고 한 뒤 숙소로 차를 돌렸다. 숙소에서 아쿼틱센터까지는 도보 2분 거리(190m)이다. 지상 주차장에 감사하며 얼른 주차하고 아쿼틱센터를 찾아갔다. 좀 전에 내려준 곳보다 꽤 들어가는데 잘 찾아갔으려나.. 살짝 걱정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마음에 서둘러 들어갔다. 캠프 데스크의 직원에게 내가 가져온 서류 등을 주섬주섬 꺼내니 "아, 아까 들어간 그 아이들?" 하는 표정이다. 속으로 잘 들어갔구나 싶어 내야 할 서류를 내고 서명하고 주의사항 듣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Swim & Splash
100년의 역사를 가진 명성 있는 대학교의 수영장이라 그런 걸까... 규모가 상당했다. 우측에는 선수용 50미터 레인이 있고 좌측에는 일반 25미터 레인과 얕은 수위의 어린이 풀이 있다. 어린이풀에는 물에 뜨는 각종 재미난 물놀이 용품들이 있어서 엄청 재밌어 보였다. 안전요원들이 코너별로 돌고 있어 뭔가 더 전문적이고 안심되어 보였다.
유아풀 앞으로 부모 관람석이 있는데 우리나라 풍경과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유리벽 아래로 내려다보는 뭔가 분리되고 경직된 분위기인데 여긴 같은 눈높이에 허리 아래 높이의 가드만 있고 테이블과 벤치가 넉넉히 있어 음식을 싸온 가족, 노트북이나 책을 가져온 가족이 편하게 서로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일단 아이들이 각자의 반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숙소로 다시 돌아와서 체크인 데스크로 향했다. 이른 시간에 온 걸 미안해하며 체크인 되겠냐고 슬쩍 물었는데 키 큰 훈남 직원이 흔쾌히 가능한 방이 있다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단다. 잘생긴 데다 친절하기까지 한 그 직원은 그냥 기다리며 서있기 멋쩍어서 물어본 질문에 뭘 그렇게 프린트물을 챙겨주는지... 혼자서 객실로 옮기는데 여러 번 손에 쥔 걸 놓칠뻔한 걸 겨우 가지고 들어왔다.
UBC West Coast Suits
방은 역시나 사진만큼 넓거나 세련되어 보이진 않았다. 세월이 느껴지는 가구에 냉장고며 식기세척기 모두 콘도가 아닌 호텔룸 사이즈여서 이모저모 살짝 아쉬웠지만 위치만큼은 최고였다.
들어가는 입구도 정원이 잘 꾸며져있어 오며 가며 시원한 그늘 바람에 잠깐 쉬어가곤 한다.
물놀이 후엔 짜파게티
만 12세 이하는 보호자가 사인을 해줘야 귀가할 수 있다. 걸어서 코앞인 거리인데도 결국 내가 매일 데리러 가야 하는 숙명인 셈... 아이들을 데리고 숙소로 와서 점심 메뉴를 물으니 짜파게티와 가락국수의 경쟁이 치열하다.
결국 조용히 막내 편을 들어 짜파게티 3개에 가락국수 1개로 요리사 맘으로 정리! 수영과 물놀이 덕분일까.. 싸간 샌드위치도 먹었다면서 밥까지 말아서 깔끔하게 다 먹었다.
레크리에이션 랠리
1시부터 4시까지는 UBC 곳곳을 다니는 레크리에이션 랠리 프로그램이다. UBC 캠퍼스 시설도 한 번씩 가볼 수 있고 레크리에이션도 재밌을 것 같아 신청했는데 첫날은 야구장이다. 야구장에 내려주는데 두 아이가 모자를 안 챙겨 왔다. 나가기 전부터 그렇게 챙기라고 했건만...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도저히 맨얼굴로는 안될 것 같아서 아이들을 교실 담당자에게 인계하고 다시 숙소로 갔다. 한 개는 찾았으나 한 개는 못 찾아서 내 모자를 챙겨서 부랴부랴 갔는데 이미 모두 이동한 뒤였다. 사무실에 가서 물어서 야구장으로 가서 아이들을 찾긴 했는데 도무지 들어가는 방법도 입구도 모르겠다.
마침 가로질러 가는 야구복 입으신 분을 발견! 전달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갖다 주신단다. 야구장 훈남도 역시나 친절했다. 그렇게 어렵게 모자를 전달하고 훈훈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둘째 딸이 자기 모자 아니라며 뿔이 나서 나를 보며 액팅을 한다. 모자 사이즈가 큰 게 마음에 걸려서 큰 딸에게 수신호로 둘째랑 모자 바꿔주랬더니 큰 딸은 또 싫단다. 멀리서 수신호로 건네는 모녀간의 대화가 이렇게 험악할 줄이야... 그래도 큰딸이 자기 모자 벗어서 둘째를 주고 내 모자를 쓰길래 거기까지만 보고 내려왔는데 차로 오는 내내 허털하다. 이래서 사춘기 아이들과는 여행을 자제하는 건가... 혼잣말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덤덤이 쏟아내며 주어진 2시간의 자유시간을 어떻게든 재밌게 보내자 싶어 아까 봐 뒀던 마트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우리의 새로운 동네 Westbrook
캠퍼스 안인데도 마트에 음식점에 상가에 병원에 웬만한 작은 동네 수준이다. 그런데 너무 깨끗하고 한적하다.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거리를 둘러보는데 내내 기분이 좋았다.
초가을 선선한 날씨에 맘껏 설레며 동네 탐방을 시작했다. 아이들 데리고 오면 딱 좋을 초콜릿 샵도 있고 마지막 와인 쇼핑으로 들릴 BC Liquer 샵도 있고 대만 우육면 집, 딤섬집 등 다양하다. 제대로 된 커피숍을 가고 싶어서 두리번거렸는데 마침내 좀 먼 코너에서 마음에 드는 한 곳을 발견했다.
덩치 크고 훈훈한 인도 계열 아저씨가 친절하게 곁들일 디저트를 물어서 순간 넘어갈 뻔했지만 정신줄을 잡고 라테만 시키고 계산 줄을 비켜섰다. 먹고 갈 거냐는 물음에 항상 솔직하게 먹고 가겠다고 해서 늘 나만 도자기잔이다. 우리나라 카페는 투고 잔에 받으면 바로 들고나가야 하는 분위기인데 여긴 뭔들 상관없는 분위기다. 무거운 도자기잔을 한 손으로 휘청거리며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들고 테라스 자리로 나왔다.
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외국에 있구나 실감되며 또 기분이 좋아진다. 쨍하게 맑은 햇살 아래 노천 테이블에서 커피 마시며 즐기는 오후. 게다가 선선한 바람까지 더해져서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한 시간을 넘기자 그늘져있던 테라스에 햇빛이 들면서 반팔을 입은 팔이 뜨겁다. 얼굴이야 모자와 선글라스로 어떻게 가려본다지만 노트북을 치는 손은 어떻게 방법이 없다. 촌스럽지만 이제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차를 찾아서 다시 야구장으로 갔다. 역시나 아이들은 엄청 재밌었단다. 야구장이길래 배트 잡고 휘두르려나 싶었는데 발야구를 했단다. 뭐든... 새로운 경험은 값진 거니까. 게다가 언제 또 UBC 야구장을 마음껏 달려보겠나 싶었다.
다시, Vancouver Central Library
오늘의 방과 후는 도서관이다. 웬일로 아이들이 입을 모아 도서관을 가자고 해서 9시까지 문을 여는 오늘로 날을 잡았다. 역시나 오후 4시는 교통체증이 심하다. 약 40여분에 걸쳐 도착하는 동안 아이들은 거의 실신상태로 잠들었다.
아들 녀석이 마지막까지 버티길래 "역시... 혼자 운전하는 이모 외로울까 봐 안 자는구나. 오늘도 또 감동이네." 하고 백미러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불과 몇 분 후 입 벌리고 수면에 동참... 역시나 오늘도 고독한 드라이버 킴이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막내가 버블티를 주문한다. 슬쩍 외면하고는 책을 보자며 들어갔다. 그들의 목적을 알고 왔지만 그래도 버블티는 목적이 아닌 보상이어야 했다. 한 30분 지났을까... 묵묵히 책을 보던 애들에게 슬쩍 다가가 "버블티 마실래?" 했더니 냉큼 일어선다.
25달러를 쥐고 셋이서 신나게 나가는데 큰딸이 안 보인다.
놓고 갔다고 삐질 후폭풍이 두려워 찾아가서 슬쩍 얘기했더니 이내 평온한 얼굴로 알겠다며 다시 책을 읽는다.
가끔은...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만하다가도 내 생각을 넘어서는 생각이나 행동에 놀라곤 한다. 도서관에 읽을 책이 읽다고 하길래 그냥 핑계겠거니... 하며 흘려들었는데 정말 본인이 읽고 싶은 챕터북을 잔뜩 골라와서 테이블 옆에 쌓아놓고 처음 온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읽어가고 있었다.
나 역시 영어책이 힘들다. 젊은 시절 멋 내 보려고 원서 책도 사고 여행 간 곳에서 괜히 소설책 사서 품에 안고 다니고 했는데.. 늘 결말은 책장 한편의 장식물이었다. 그래도 챕터북을 좋아하는 아이로 컸으면 하고 바라며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빌려서 늘 올려놓는데도 반응은 늘 미지근했다. 물론 도서관에 손이 가는 책이 영어책뿐이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이라 할 지라도 읽고 싶은 책 제목을 검색하고 선반에서 찾고 꼼짝 않고 읽는 모습에 흐뭇하고 대견했다. 한국의 남편에게 사진 찍어 보내니 남편 왈 "그림책 아냐?" 역시 불신의 늪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만화책, 보드게임, 체스 등 나름 다양하게 도서관을 활용한 아이들과 8시가 넘어서야 도서관을 나왔다. 마침 차도 안 밀리는 시간이라 네비상으로 20분도 안 걸려서 숙소에 도착한단다. 도서관을 나오기 전 저녁을 스스로 준비하겠다며 요리책을 보더니 찍어온 레시피를 얘기하며 계속 장을 보자고 주장한다. 결국 숙소 가는 길에 Safe way를 발견하고 잠깐 들렀다. 두 명은 체다치즈 트위스터를 하겠다며 치즈 산다고 난리다. 나머지 두 명도 뭔가 하고 싶은 눈치길래 스테이크와 연어 한팩씩을 사서 맡겼다.
오늘의 샤워 순서는 요리 배정이 없는 내가 첫 번째다. 여정 중 최초의 사건이다. 우선 세탁을 해야 해서 2인 1조로 데스크에 가서 코인로커 위치와 금액을 알아보라고 보냈더니 잠시 후 카드가 5달러인데 카드만 있으면 계속 세탁할 수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그럼 카드를 사 오지 그랬냐고 했더니 "아하~"하더니 다시 데스크로 간다. 그사이 연어팀은 주방에 서긴 했는데 뭔가 주문이 많다. 샤워실에 들어가기는커녕 그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내내 주방에 서 있는 중이다. 막 들어가려는데 연어를 올린 팬에서 나오는 연기가 방안 가득 난리다. 결국 스테이크는 내가 하기로 하고 테이블 세팅만 부탁한 후 샤워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막 시작하고 있는데 세탁조가 오더니 화장실이 급하다고 밖에서 난리다. 미안한 마음에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보니 생각보다 바깥은 평온하다.
큰 딸이 구운 연어도,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에 구운 내 스테이크도 레스토랑 부럽지 않게 저녁이 차려졌다. 마트에서 많이 산다고 구박하던 애들이 연어와 스테이크를 먹어버리고 결국 남은 몇 조각에 와인을 보태고 아이들에게 외면당한 당근케이크를 곁들여 저녁을 마무리했다.
새 숙소에서의 첫 밤이라 그냥 자긴 아쉬워서 텔레비전에 핸드폰을 연결해서 넥플리스로 어벤저스를 봤다. 따끈하게 갓 튀긴 팝콘 두 봉지와 함께! 핸드폰 배터리가 금세 사망해서 오래 보진 못했지만 어쨌든 아이들에게 팝콘 먹으며 영화 보던 밴쿠버의 밤이 길게 기억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