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적응기
저는 공인회계사입니다. 회계사라는 것이 나름 수준 높은 전문가라고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회계법인에 들어가면 정말 야근 많이 하고 고생 많이 하는 캐릭터로도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저도 나름 크다는 회계법인에 들어가서 전문가로서의 자부심도 느꼈고, 생존의 위협을 느낄 만큼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곳에서 9년을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만두었습니다.
퇴사의 이유를 대라면 A4에 10장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두어 달 정도 지나니 이젠 다 희미해지고 한 가지 이유만 떠오르네요
원래는 한 두어 달 세계여행이라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처와 자식과 빚이 있는 가장은 그런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기별로 한 달씩만 상장회사의 회계결산을 돕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프리랜서로 그냥 혼자 가서 일합니다. 수입은 조금 줄었지만 한 달만 일하고 두 달은 놀 수 있으니 개꿀(?)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갑자기 파인드어스에서 연락이 옵니다. 교육팀이 필요해요.. 함께하실래요?
사실 저는 지난 회사에서 잠시 동안 회계 전문 외부강사였고, 실제로 직접 강의하고 교육을 기획하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우연히 스타트업캠퍼스에서 강의를 해본 경험도 있었고요
'스타트업'과 '교육'은 제 호기심을 자극하는 두 가지 키워드였습니다.
이때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오겠냐 싶어 그냥 덥석 하겠다고 합니다. 다시 월급쟁이가 된 것이지요.
장기휴가를 떠나겠다는 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결론적으로 투잡을 뛰게 되었습니다. 언제쉬지?ㅠ_ㅠ
프리랜서일은 딱히 어려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지난 9년간 해왔던 일 하는 것과 비슷했으니까요.
어려운 것은 스타트업의 세계였습니다.
굉장히 생소한 것 투성입니다.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 일단 대화하다가 잘 모르는 부분은 나중에 다시 찾아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인사, 마케팅, 투자 등 경영학에서 배우거나 기존 산업에서 경험했던 것이 이제는 많이 바뀌었구나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뛰어납니다. 제가 본 스타트업 관련 종사자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중후반까지였는데요, 일반 회사였다면 대리에서 과장 정도의 연차일 것입니다.
근데 그런 분들이 대부분 대표 또는 팀장의 역할을 하다 보니 기존 산업의 동년배와는 사고의 폭이 다릅니다.
(물론 각자의 영역에 따라 필요로 하는 역할과 기능이 달라서 그렇겠지만..)
젊은 시절부터 치열하게 생존을 고민하고,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며 살다 보니..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업무적으로도 많이 성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굉장히 능동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끄러워졌습니다.
어찌 보면 전통산업(?)에서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해왔고 나는 그것을 잘 몰랐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좁고 깊게 아는 사람인 것이지요
근데 저는 제너럴리스트(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가 되는 것이 원래 꿈입니다.
무엇을 물어도 대답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융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회계를 가지고 밑으로 파내려 간 건 삽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삽질은 아니었죠. 회계라는 삽을 얻었으니..
그 삽으로 저는 이제 좌-우를 파보려고 합니다.
회계로 보는 스타트업, 회계로 보는 세상, 회계로 보는 인문학, 회계로 보는 과학.. 뭐 이런 거 가능하지 않을까요?
회계라는 것은 일종의 언어이자 생각의 프레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뭐해먹고 살 거냐?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