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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Jun 18. 2022

카메라 수난사 Part1 - 추격자

네 번이다 장장 네 번을 잃어버렸다.

보통 한 번 잃어버리기도 힘든 카메라를 네 번이나 잃어버렸으면 말 다 한 거지. 그중 두 번은 운이 좋게 찾았으나 도난당한 두 번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여정의 처음부터 만만치가 않다.


시작은 필리핀이었다. 어학연수로 머문 필리핀 세부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인디아나 존스가 되었다. 세부에 있던 어학원은 한 주마다 입학하는 학생들을 ‘배치’라고 하여 동기 형태로 묶는다. 내가 공부했던 어학원은 평일에는 외출이나 외박이 허락되지 않고 주말에만 나갈 수 있는 기숙사형이었는데 입학 후 첫 주말에는 이 배치끼리 여행을 가는 게 관례였다. 20명 남짓되는 학생들이 모여 의견을 나눈 끝에 반타얀(Bantayan)이라는 섬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햇볕은  쨍쨍했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전혀 다른 색의 파란 바다는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함께 한 동기들은 발랄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여행을 계기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대로 즐겁게 끝났어야 할 여행의 대미를 혼돈의 추격전으로 마무리하게 될 줄을 어찌 알았을까.


1박 2일의 여행이 끝나고 다들 돌아올 짐을 들고 페리에서 내려 밴에 올라탔다. 순간 손에서 허전함이 느껴졌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그 더운 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방을 뒤져봐도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누구도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애증의 페리...

그때 번뜩 페리를 타고 오며 의자 아래 고이 모셔두었던 카메라가 머리를 스쳐갔다. 냅다 페리를 향해 달렸다. 달려가는 내내 간절히 빌었건만 매표소에 다다를 때쯤 페리는 굴뚝 위로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반타얀을 향해 떠나고 있었다. 몸이 달았다. 페리가 섬까지 갔다 돌아오면 카메라는 분명 사라져 있을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어떻게든 페리를 쫓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매표소 직원에게 아는 방법을 다 동원해달라고 닦달했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진땀을 흘리며 설명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매표소 직원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야기를 듣던 주변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 어부이며 조그만 배를 소유하고 있으니 사용료만 낸다면 페리를 쫓아가 주겠다고 했다. 사내는 5천 페소를 불렀다. 필리핀 물가를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지만 지체할수록 카메라가 멀어져 갈 뿐이었다. 바로 승낙하고 배에 올라타기로 했다. 다녀오는데 2시간은 걸릴 터라 배치 친구들은 먼저 돌려보내고 나는 알아서 학원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원한 건 이렇게 여유로운 풍경이었는데...

방카 보트를 타고 페리를 쫓아 바다를 가로질렀다. 가는 내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쫓아가고 있고 페리가 눈으로 좇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몇십 분을 쫓아갔을까. 결국 중간에 따라잡지 못하고 반타얀 항구까지 가서야 페리에 닿을 수 있었다. 페리에 올라타기도 전에 배에서 소리쳐서 물었다. 영어로는 안돼서 어부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카메라를 본 사람이 있는지 다시 한번 소리쳤으나 누구도 카메라를 본 적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금 카메라를 찾아서 오는 사람에게 2천 페소를 주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갑자기 배가 분주해졌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한 선원이 내 카메라를 들고 여기 있다며 흔들었다. 잠깐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카메라를 찾겠다는 목적을 이루었으니 됐다 생각했다. 감사를 표시하며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카메라와 함께 다시 육지로 돌아오다 보니 그제야 어떻게 학원까지 돌아갈지 걱정이 됐다. 밴을 타고도 대략 2, 3시간이 걸렸는데, 택시가 있는지 아니면 버스가 있는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육지에 닿을 때쯤 어부 아저씨도 내 표정을 읽었는지 괜찮냐고 물음을 던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저 부탁해보자 싶은 마음에 도박을 걸어봤다. '현재 수중에는 뱃값에 카메라를 돌려받은 값까지 7천 페소나 되는 돈이 없다. 돈을 주려면 세부 시티까지 가야 하는데 길을 안내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난감해진 듯 잠시 망설였지만 워낙 큰돈인 만큼 마무리까지 해야겠다 싶었는지 세부 시티까지 함께 해주기로 했다.


뭔지 모르지만 준비할 게 있다는 말에 툭툭이를 타고 아저씨의 집까지 이동했다. 금방 준비를 마치고 나온 아저씨와 트라이씨클을 타고 고속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내가 생각한 우리나라의 고속버스 정류장이 아니었다. 버스는 딱 1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정류장 건물은 조그만 2층짜리였다. 그나마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 화장실을 다녀오려 했더니 유료란다. 일을 보고 버스에 올랐더니 더 가관이다. 시트는 헤져있고 스프링은 없다고 봐야 했다. 에어컨도 없어서 창문을 열고 달려야 그나마 흐르는 땀이라도 식힐 수 있었다. 해 질 녘에 탑승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나름(?)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습니다

세부 시티까지 2, 3시간은 굽이굽이 달렸다. 왜 굽이굽이냐? 고속버스라고, 당당히 ‘Express’라고 버스 옆면에 새겨놨지만 길은 비포장 도로였다. 버스 창 밖으로는 열대 우림이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열대 우림'이었다. 멀리도 아니고 창 밖 바로 옆으로 그런 풍경이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가는 내내 지난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되짚어봤다.


하루 만에 여기 있는 탈 것을 다 타봤네? 하...!

페리, 방카 보트, 툭툭이, 트라이시클, 고속버스까지 이틀 동안 필리핀에서 탈 수 있는 거의 모든 교통수단을 경험했다. 그것도 혼자서. 연고도 없는 곳에서 겁도 없이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났다. 나쁜 일이 벌어지려면 얼마든지 벌어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잠시 으스스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운이 좋게 나름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 별 탈없이 안전하게 고속버스를 타고 가고 있으니 나름 성공적이지 않은가 하고 자평했다. 세부 시티에 가까워지면서 가로등과 식당 등 도시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그래도 제대로 왔구나 싶은 생각에 다시 한번 마음을 쓸어내렸다. 고속버스에서 내려 돈을 뽑기 위해 정류장 옆에 있는 SM몰에 들렀다. 카메라 값에 뱃값, 고속 버스비에 수고비까지 거의 8천 페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큰 지출에 속이 쓰렸지만 카메라 값에 비하면 지불할만하다고 위로했다.


택시를 타고 학원으로 돌아가니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배치 친구들은 다들 숙소 앞 방갈로에서 기다리다 돌아오는 나를 반겨주었다.

"카메라는 찾았느냐?", "어떻게 돌아왔느냐?"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자리를 잡고 길었던 여정을 풀어냈다. 그러다 보니 나간 돈에 쓰렸던 속도 괜찮아졌다. 오히려 누구도 해보기 힘든 경험을 하루 만에 몰아서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날 학원에는 첫 주차 여행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가 혼자 돌아온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물론 배치 친구들이 퍼뜨린 이야기였다. 쓸만한 이야기 하나를 남긴 것 같아 나름 뿌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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