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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Oct 13. 2022

우리는 모두 시간을 여행한다.

프롤로그 혹은 에필로그

'단지 잊혔다고 돌이켜 볼 수 없는 경험은 드물다. 열심히 노력하고 꾸준히 상기시키면 된다. 과거의 문은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것을 잊었을 때만 닫히기 때문이다.'

로버트 그루딘 《시간, 그리고 삶의 기술》

Experience merely forgotten is seldom beyond recall, if we try hard and patiently to bring it back. It is only when we forget having forgotten that a door closes between us and the past.

Robert Grudin 《Time and the Art of Living》


10년 안에는 한 번쯤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2020년 봄, 호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런저런 이유로 건강을 꽤 해친 상태였고 정신 상태도 다소 피폐해진 터라 잠시 일상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몇 개월 정도 머무르면서 마무리하지 못한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한동안 묵혀뒀던 사진들을 다시 들춰보고 당시에 공부했던 수업의 교재도 괜히 뒤적뒤적거려본 걸 보니 나도 모르게 꽤나 들떠있었나 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전무후무한 팬데믹 사태가 터졌다. 1월에는 별일 아니라 생각했고, 2월에는 그래도 괜찮아지겠지 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국 3월에 들어서자 WHO에서 코로나 19 팬데믹을 선포해버린 거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까. 공항 리무진도 중단되고 결국 하늘길도 막혀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떠나기 전에 막혔다는 것 정도였다. 계획대로라면 4월쯤 호주 멜버른에 도착해서 8월 정도까지는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6월부터는 락다운이 결정되고 8월에는 재난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자칫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만 걱정시키는 꼴이 될 뻔한 거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기다리던 것이 하루 이틀, 일주 이주, 한 달 두 달 넘어가며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결국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겨울이 되어버렸다.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누구를 탓하겠냐마는 아쉬운 마음은 달랠 길도 없고 속앓이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된 바, 어떻게든 콧바람을 쐬어주지 않으면 속이 곪아버릴 듯 해 결국 결심했다. 지난 10년 간 지나왔던 그 시간을 다시 여행해보기로.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중간에 일어났던 카메라 도난 사건으로 인해 잠시 아이팟으로만 찍었던 3개월을 제외하고는 꽤나 많은 사진을 찍었던 터라 지금도 사진을 보면 생생히 기억나는 장소와 사건이 많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새로운 여행을 다녔을 거다. 언젠가 다녀왔던 여행은 새롭게 쌓아 올려진 기억 아래에서 점점 먼지가 짙게 덮여 어쩌면 보이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사 새옹지마인지 이런 기회를 통해 과거의 여행을 반추하게 될 줄은 몰랐다. 글을 쓰려다 보니 한 번 떠올리는 것으로는 부족해 계속해서 당시를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더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사진에 남아있던 기억은 물론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던 기억까지. 기묘한 일이었다. 기억의 유통기한이 아직 다하지는 않았던 걸까.


잊었던 기억을 더듬고, 기억 속 빠져있던 순간들을 채워가다 보니 자연스레 당시의 기분이 생생히 떠올랐다. 비행기 문을 나선 순간 느껴졌던 숨 막히는 동남아의 열기는 처음으로 한국이 아님을 피부로 느끼게 해 줬다. 스페인의 고속도로, 지평선 너머 하늘과 맞닿은 만년설의 아름다움은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의 피로도 잊게 만들었다. 몇 개월 간 매일 같이 싸 먹었던 그 지겨운 도시락, 그 지겨움 조차도 시간이 흐르며 그리움이 묻어 나오는 한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더 지났다면 그대로 잊혀져 없었던 일이 되었을지도 모를 나의 시간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기억을 돌아보며 느꼈던 수많은 감정은 앞으로 있을 나의 여행을 여러모로 변화시킬 것만 같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미 지나간 시간을 걸으며 미래의 달라질 여정을 예감한다는 것이.


이제 하늘 길이 다시 열렸다. 아직 이전처럼 자유롭지는 않지만 가고자 한다면 떠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어디인가. 다음은 어디일지 모르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련다. 그리고 그 여정이 미래의 나에게도 잘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이어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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