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이 궁금하신 분들은 [카메라 수난사 Part1 - 추격자 https://brunch.co.kr/@jzjz0219/28]를 읽어보세요.
한 번 정도 잃어버린 걸로는 수난사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하지 않은가.
캐논 400D와는 호주에서 이별을 고하게 되는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잃어버리게 된다. 필리핀에서 잃어버린 일까지 더하면 총 세 번에 걸쳐 이별하게 된 것이다. 호주에서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멜버른 툴라마린 공항에 도착한 첫날부터 시작한다.
9월 1일 아침 비행기로 멜버른에 도착했다.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는 우리나라와는 계절이 반대다. 사람을 쪄버릴 것 같던 필리핀의 더위에 익숙해졌던 나에게 호주의 첫인상은 다소 쌀쌀했다. 물가도 한몫했던 것 같다. 픽업 차량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중 콜라라도 하나 마실까 해서 자판기를 봤는데, 무슨 콜라가 2달러던가 3달러던가... 한 캔에 몇 백원 안 했던 필리핀의 물가에 비해 몇 배나 뻥튀기된 금액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투덜대는 것도 잠시, 드디어 호텔까지 데려다 줄 픽업 차량이 도착했다. 상당히 나이스한 외제차에서 내린 기사님은 마치 산타클로스 같았다. 데리러 와준 게 좋아서가 아니라 외모가 당장 빨간 옷을 입어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얗고 풍성한 수염은 코와 뺨, 턱을 거쳐 가슴까지 내려왔고 풍채가 좌우양 옆으로 넉넉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대신 짐을 트렁크에 넣어주고 함께 차를 탔다.
푸근한 인상 덕분인지 호텔까지 가는 길은 내내 평온하고 즐거웠다. 기사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호주에 오게 된 이유라던가, 얼마나 있을 거라던가 별 것 아닌 이야기가 오갔다. 둘이 나눈 이야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풍경은 군데군데 잊혀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었으니까. 길게 펼쳐진 초원과 그 너머로 보이는 푸른 산. 아침 햇살을 받아선지 따뜻하고 싱그러웠다. 그 느낌을 간직하고 싶어 중간중간 사진을 찍었다.
차는 막힘없이 호텔을 향해 갔다. 30여분을 달렸을까. 차창 오른쪽으로 안내 책자에서 봤던 유리로 된 호텔의 모습이 나타났다. 브레이크프리 벨 시티 프레스턴(BreakFree Bell City Preston). 한 달간 신세 지게 될 내 숙소였다. 푸근했던 기사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호텔 리셉션에서 벨을 눌렀다. 직원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예약 영수증을 전달했다. 예약을 확인하던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예약은 확인이 되었으나 방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 입실할 수가 없다고 했다. 짐을 풀고 잠시 쉴까 했던 계획이 무산된 게 아쉬웠지만 이렇게 된 김에 바로 나가서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직원에게 짐을 맡기고 카메라 가방만 둘러맨 채 호텔 밖으로 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 낯섦이 가슴을 뛰게 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내 몸은 반쯤 공중에 띄워진 것만 같았다. 해가 조금씩 머리 위로 떠오르며 쌀쌀했던 날씨도 걸어 다니기 좋게 선선해졌다. 화창한 푸른 하늘 아래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한 장씩 카메라에 담았다. 길거리는 한적했다. 공원이 많고 녹지가 풍부해 새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자그마한 놀이터에서는 한 엄마가 아이에게 그네를 태워주고 있었다.
도로 양 옆으로 상점가가 줄지어 선 길을 따라 내려갈 때도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건물 대부분이 1, 2층밖에 안 되는 낮은 건물이라 하늘을 가리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었다. 도로도 직선으로 길게 뻗어있어 어디까지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될 정도였다. 한참 길을 따라 내려가던 중 발견한 책방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하려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 건너편 가게에는 심슨 가족이 실물 크기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빠 심슨 옆에 앉아 어깨동무를 해보기도 했다.
큰길을 걷다가 안쪽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겨봤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지역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가 나왔다. 다들 단독 주택에 마당이 있어 꽤나 부러웠다. 대부분 주택 울타리는 내 키와 비슷한 수준이라 2미터 가 채 안 되는 것 같았는데 몇몇 집에서는 레몬 나무가 울타리를 넘어 길가까지 뻗어있었다. 책으로나 봤지 직접 본 적이 없던 터라 나무에 매달린 레몬을 만져보며 신기해했다.
그렇게 1, 2시간쯤 걸었을 때 나름 커 보이는 쇼핑센터를 발견했다. 노스코트 플라자 쇼핑센터(Northcote Plaza Shopping Centre)에는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해 있었다. 돌아다니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크기여서 구석구석을 돌아보다가 뒷문으로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널찍한 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올 네이션스 공원(All Nations Park) 한가운데에는 올라설 수 있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었다. 높은 곳이 있으면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그대로 동산을 걸어 올라갔다. 3미터 정도 될 듯해 보이는 동산에 오르자 모든 풍경이 달라졌다. 그저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섰을 뿐인데 주변은 물론 저 먼 곳의 풍경까지도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꽤 걸었던 터라 다리도 아프고 조금 지친 듯했던 몸에 다시금 기운이 솟았다. 주변에 보이는 다양한 풍경을 사진으로 빠짐없이 남기고 싶어 한동안 셔터를 눌러댔다.
걷다 보니 꽤나 멀리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슬슬 돌아가면 방이 준비되어 있을 시간이라 호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돌아가다 보니 닫혀있던 카페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었다. 작은 한 칸 크기의 카페들이 도로에 야외 테이블을 펼쳐놓았고 동네 주민인 듯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는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용기도 없던 때라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지금에 와서는 꽤나 아쉽다. 아니지 결과적으로는 아쉬울 게 없는 일이 되긴 했다. 하. 하. 하.
호텔로 돌아와 리셉션 데스크에서 방이 준비되었는지 물어봤다. 무슨 일인지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단다. 1시 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바로 옆 건물의 1층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도 애매하게 떠있던 터라 무료하게 있을 바에야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 수다나 떨어야겠다 싶었다. 한참 통화를 하고 나서 현금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갑에 남은 금액을 확인하고 ATM기에서 현금을 뽑아 지갑에 넣었다. 소파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리셉션에 갔다. 드디어 방이 준비됐다. 캐리어와 모든 짐을 들고 드디어 방에 입성했다. 4, 5평 정도 되어 보이는 2인 1실에 싱글 침대가 2개 놓여 있었다. 다른 룸메이트가 올 때까지는 혼자 사용해도 된다고 해서 나름 넓게 사용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사를 하는 한 달 후까지도 아무도 오지 않아 마지막까지 여유롭게 사용했다. 시작부터 나름 운이 좋았지.
짐을 내려놓고 하나씩 정리하는데 카메라 가방만 있고 카메라가 없었다. 짐이 많다 보니 안 보이는 건가 싶었는데 하나하나 다 뒤져봐도 없다. 다시 한번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분명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카메라는 내 손에 들려있었다. 그런데 방에 도착하니 없다. 어디 있지? 아니 어디다 놔둔 거지? 어디에서 카메라를 놓친 건지 기억하기 위해 머릿속을 이 잡듯이 뒤져봤다. 하지만 기억이 날 정도면 카메라를 놓고 올리가 없지. 역시나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호텔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다 생각하고 리셉션 데스크로 뛰어갔다. 내가 머무는 호텔의 리셉션 직원은 카메라를 본 적이 없고 유실물로 온 것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바로 옆 건물로 다시 갔다. 기억에 남아 있는 동선을 따라 카메라를 수색했다. 로비의 소파, 공중 전화기, ATM기, 건물 바로 앞 야외 테이블까지 다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로비에 있던 건물 직원에게 카메라를 본 적이 없는지 물었다. 그 직원은 '당신이 그 카메라 주인이구나'하는 표정으로 자기 동료가 방금 카메라를 주워왔으니 한번 확인해보자고 했다. 터질뻔했던 심장이 겨우 가라앉히고 그 직원을 따라갔다. 카메라를 주운 직원이 오더니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카메라 기종은 무엇인지, 언제쯤 잃어버렸는지 묻더니 당신 카메라가 맞는 것 같다며 건네주는데 얼굴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직원이 힘들게 입을 열더니 '카메라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이거 저거 눌러봤는데, 자신이 카메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조작하다 보니 안에 있던 사진이 지워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기억상실증에 걸린 카메라지만 돌아와 준 것이 어딘가. 카메라를 찾아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것들은 사소한 듯 보여서 걱정하지 말라며 고맙다고 악수를 청했다.
카메라를 놔두고 온 장소가 궁금해서 어디에서 찾았냐고 물어보니 공중전화 옆에 떡하니 놓여 있더란다. 통화한다고 카메라를 놓고 오다니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없다. 몇 시간 동안의 기록이 모두 사라져 버린 건 아까운 일이지만 또 가서 찍으면 된다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잃어버렸더라도 이렇게 다시 찾으면 그다지 속 쓰릴 일도 없다. 근데 뭐든 삼세판이라고 하던가. 나와 400D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은 이로부터 채 3개월이 지나지 않아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