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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Sep 11. 2019

#13. 첫걸음과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수많은 위험 속에서 살아가려면 갓 태어난 새끼라도 빨리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지 못한 새끼는 버려지고 만다”


미국의 <조지 캐시> 감독이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서 했던 말이다.


세상의 동물들은 태어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다. 하지만 모든 동물이 그런 것은 아니다. 다큐 『아프리카, 세렝게티』 말미에 등장하는 갓 태어난 새끼 누우는 일어서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일어서려 애쓰지만 거기까지다. 일어설 만하면 쓰러지고, 일어서다 쓰러지길 반복한다. 영상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이를 지켜보는 어미 누우 마음은 오죽할까. 안타깝지만 도울 방법이 전혀 없다. 일어서는 것은 새끼 누우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이다. 자연법칙이 그렇다. 새끼 누우는 그 마음을 아는지 연신 발버둥을 친다. 


자칼과 독수리가 냄새를 맡았다. 누우들이 위험을 감지했는지 하나, 둘 자리를 뜬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건 어미 누우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위험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우는 초원의 약자다. 포식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상황에서 새끼 누우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초원의 청소부 하이에나까지 나타난 상황에서는 판단의 여지가 없다. 할 수 없이 새끼를 뒤로 하고 어미 누우마저 자리를 떠난다. 이런 상황에서 새끼 누우가 살아남는 것은 기적이다. 절박한 상황이지만 이제 새끼 누우를 지켜줄 그 무엇도 없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포식자의 밥이 될 운명에 처하고 만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비극적 상황으로 치닫는다.

갑자기 영화의 배경 음악이 바뀐다. 긴박감이 느껴진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같은 순간, 카메라는 새끼 누우를 비춘다. 쓰러지길 반복했던 새끼 누우가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서는 모습이 잡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감동도 이런 감동이 없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일어서긴 했지만 걷는 모습이 위태 위태하다. 가냘픈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가며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짠하다. 산다는 게 뭔지 애절함이 느껴진다. 그런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는 누우들이 색한다. 어쩔 수 없이 새끼 곁을 떠나야 했던 어미 누우 얼굴이 밝게 피어난다. 얼마나 기쁠까. 카메라 앵글에 잡힌 어미 누우의 얼굴에서 안도하는 마음이 읽힌다. 새끼는 그렇게 누우 무리 속으로 합류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남자 6형제가 사는 집에 필자의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막내였는데, 집에 놀러 가면 항상 봉투(일명 쇼핑백)를 접고 있었다. 하루는 그냥 기다리기 뭐해서 조금씩 도와주었는데, 그때마다 친구 아버님이 용돈을 주셨다. 당시엔 모두 가난하게 살던 때라 용돈을 받으면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그 날 이후 봉투 접는 일을 도울 때마다, 용돈도 받고, 또 구력이 늘다 보니 봉투 접는 모든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봉투 이야기를 했다. 방산시장에 가면 종이 파는 곳이 있는데, 500장 분량의 엠보싱 종이를 사다가 봉투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날따라 어머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그러자고 하시는 게 아닌가. 다음 날 우리 모자는 방산 시장에서 엠보싱 봉투 500장 분량의 종이를 사 왔다. 그리고 몇 날 며칠 겨우 겨우 500장을 접어서 방산 시장에 납품한 일이 있었다. 그것이 13년 봉투 접기의 시작일 줄 누가 알았을까, 그 후로 봉투 접는 일은 우리 집 본업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봉투 접기는 가계 경제의 버팀목이자 우리 6형제(1남 5녀)를 공부시키는 자금 줄이었던 셈이다.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함이 봉투 접기로 이어진 것 같다. 필자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그 후 스물여덟 결혼할 때까지, 무려 13년간 이어진 봉투 접기는 이제 우리 집 가족사에서 다 같이 고생했던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절박함은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본능에 기인한 것으로 삶에 대한 간절함과 닿아있다.

포식동물의 눈은 정면에 있지만 초식 동물은 측면에 있다. 포식자는 목표물에 집중할 수 있는 위치에, 피식자는 주변 환경을 살필 수 있는 위치에 눈이 있는 셈이다.

포식자는 시야에서 사냥감을 놓치면 굶어야 한다. 피식자는 포식자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발견하지 못하면 죽는다. 초원의 왕 사자도, 먹지 못하면 죽는다. 누우도 사자의 눈을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결국 사자도 누우도 먹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사자와 누우가 초원을 뛰기 시작한다. 사자는 누우를 사냥하는 중이고, 누우는 사자를 피해 도망가는 중이다. 이 경쟁은 누가 이길까?

아마도 먹기 위해 사냥하는 사자와, 살기 위해 사지(死地)를 벗어나야 하는 누우 중에서 생존에 대한 간절함이 더 큰 동물이 이길 것이다.


매사에 절박함에 기인한 힘을 끌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과, 상상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요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의 공통점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는 사람들이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처럼 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난관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난관을 피하기 위해 돌아갈 것인지,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난관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머물며 피한다고 그치지 않는다. 차라리 쏟아지는 빗속으로 들어가라. 그래야 종국에 맑은 하늘도 본다"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정진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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