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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Oct 21. 2020

그 옛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막내딸) 나는 시집 안 가고 평생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 거다”

“(둘째 아들) 아버지 노후 걱정은 마세요. 저랑 형님이랑 아들이 둘씩이나 있는데, 뭘 걱정하세요”

“(큰아들) 제가 돈 많이 벌어서 꼭 모시겠습니다”


부모를 생각하는 세 자녀를 보면서 노 부부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몇 년 후, 자녀들이 출가할 때가 되자 자신의 배필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갖는다.


“(큰아들) 직장도 너무 멀고 해서, 저 결혼하면 분가할 생각입니다. 죄송해요 모시지 못해서”


큰 아들은 그렇게 부모에게 분가를 통보한다. 그리고 얼마 지났을까, 둘째 아들도 결혼을 앞두고 부모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둘째 아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막내딸은 결혼을 앞두고 걱정이 많다. 남의 집 며느리가 되는 상황에서 부모를 모실 처지도 아니고, 할 수 없이 오빠들처럼 죄송하다는 말로 미안함을 대신한다.


“(막내딸) 엄마 건강도 안 좋은데, 결혼 서둘러서 죄송해요. 자주 찾아뵐게요”


시끌벅적했던 집도 이젠 조용한 절간이다. 시집 안 가고 엄마 아빠랑 평생 살겠다는 딸의 다짐도, 돈 벌어서 부모를 모시겠다던 큰아들도, 노후 걱정하지 말라면 호언했던 둘째 아들도 모두 제 갈 길로 갔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허망한 때문일까? 아버지는 나지막한 소리로 이런 말을 읊조린다


“(아버지) 그렇게 우리는 말 만으로 자주 찾아봬야 하는 사람이 됐다”


침묵이 흐른다. 이어진 아버지의 독백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아버지) 우리는 다시 부부다”




노후와 관련해서 수없이 접했던 영상의 한 장면이다. 수십 번을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2분 남짓한 영상이지만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자녀들은 때가 되면 그들의 세상을 살기 위해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다. 그것은 수순이고 필연이다. 문제는 남겨진 노 부부의 노후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 양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문 방송 매체에서도 노후 빈곤의 주범으로 과도한 자녀 양육비를 꼽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녀 간 관계 설정이 중요해진다. 특히 돈과 관련해서 자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특히 대학 자녀들 용돈까지 해결해 주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다. 사랑할수록 결핍을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자녀에게 투입하는 비용을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해서는 곤란하다. 민법에서는 열여덟이 넘으면 결혼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성년이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아이 취급해야 한다는 말인가? 자녀의 인생만큼, 부모의 인생도 중요하다.


180만 원.

 9살 외동딸을 우는 동료 직원의 월간 사교육 비용이다. 8살, 10살 난 두 아들을 키우는 또 다른 직원의 사교육비는 약 200만 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과하다'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좋은 학원에 다닌다고 내 아이도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아이들이 부모 뒷바라지에 힘입어 성장했다고, 늙은 부모를 끝까지 책임지는 세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좋은 직장을 다닌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만약을 위한 자구책이 필요하다. 물론 개인의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강제할 생각은 없다.


부모의 과 자녀의 삶은 다르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올인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녀들은 그들의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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