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범 Feb 04. 2021

삶은 불확실한 인생 과정, 죽음은 틀림없는 인생 매듭

이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라도 주어졌으면 좋았으련만


친지 죽음은 곧 우리 자신 한 부분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들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며, 현재 삶에 대한 반성이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 매듭이기 때문에, 더 엄숙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한두 차례 시행착오도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그럴만한 시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잘 죽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

-법정스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중에서



지난 일요일(1월 31일) 저녁 8시 즈음, 여주 사는 셋째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여주 안방 사돈어른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아직 장례식장이 결정되지 않아 병원에 있다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울음이 그칠 즈음 장례식장이 결정되면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통화를 마쳤다
 
 이튿날, 출근하기 무섭게 전화가 왔다. 여주 장례식장에 모셨다는 것이다. 부랴 부랴 여동생들에게 부고장을 보내고 발인 날이 화요일이기 때문에 오늘 저녁(월요일)에 문상을 간다고 알렸다. 가장 멀리 사는 익산 동생의 회신이 가장 빨랐다. 근무 끝내고 남편과 함께 6시쯤 출발하면 여주에 8시경 도착하니까 그때 보자는 것이다. 이어서 4명의 동생들도 그 시간에 맞춰 부부 동반으로 모이자는 약속이 이어졌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 일 년 동안 가족 모임을 파했는데, 이번 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여주 어른은 우리 형제들과 인연이 깊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만 해도 매년 4월이면 여주에 살고 있는 셋째 동생 집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 형제들을 반갑게 맞아주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주 동생은 20여 년간 살았던 여주 시내 주택을 뒤로하고, 몇 해 전에 막내 시누이 부부와 함께, 여주 근교 매룡동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았다. 1남 5녀인 집으로 시집을 가서, 지금까지 20 수년간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지난 일요일 저녁 7시 30분, 예상치도 못한 시점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두어 달 전, 그동안은 옆집 막내 시누이와 사이가 좋아서 그런지, 여주 동생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는 일이 한 결 수월 했단다. 하지만 막내 시누이가 일을 시작하면서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조카들도 대학생이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나가고, 옆집 시누이와 여주 동생 부부가 일터로 나가면, 시어머니 혼자 집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치매 증상이 있는 시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할 수 없이 가족회의를 거쳐, 여주를 떠나 산 적이 없는 시어머니를 큰 시누이 집으로 옮기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며칠이 못 가 큰 딸에게 여주로 보내달라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여주에서 살았는데 타지에서 생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노인에겐 무리인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로 다시 돌아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돌아온다면 시누이와 여주 동생 중 한 명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정을 알고 있는 큰 시누이는 어머니를 달래면서 모시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밤새도록 소변을 보겠다고 들락날락하는 일이 벌어지더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큰 시누이도 지치기 시작했고, 급기야 도저히 모실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접할 때마다, 여주 동생은 마음이 편치 않았단다. 할 수 없이 다시 모셔 와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검사과정에서 체내 염증 수치가 너무 높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패혈증으로 이어진 것이다. 할 수 없이 서둘러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과정이었는데, 그만 심정지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심장이 좋지 않아 스텐트 삽입술 받은 이력이 있기 때문에 늘 조심했는데,… 고령의 나이에 체력까지 소진된 상황인지라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문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내가 이런 말을 한다

 
 “그렇게 여주 집으로 오고 싶어 하셨는데, 그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그걸 못 해 드린 게 가슴 아프네, 당신이 살던 곳에서 익숙한 장소에서 인생을 정리하고 싶으셨을 텐데…”


"어르신 건강이 좋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밤새 소변보는 일로 밤잠을 설치셨다는데, 그때 큰 시누이가 얼른 병원으로 모셨으면 좋으련만, 나이 드셔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게 오판인 거지, 이젠 다 지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여주 동생 마음이 그랬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문득 이별의 정이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빈손으로 왔으니 갈 때도 빈손인 건 맞지만, 여주 동생 가족들과 이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라도 주어 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 말처럼 어른이 쓰셨던 방이라도 돌아보고, 당신이 사용하던 것들을 살펴보기도 하면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사치는 아닐 텐데, 그 어른에겐 그 마저도 허락되질 않았으니"
 
 "그러게"
 
평생을 모셨는데, 마지막 두어 달을 모시지 못하고 시어머니를 보낸 여주 동생에게, 오래도록 아픈 후회로 남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린 추억을 소환시킨 드러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