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것들, 그중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
죄책감을 인지한 순간, 인지한 자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다. 10년 뒤에 생명을 부여받기도 하고, 10일 뒤에 부여받기도 하고, 심지어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생명을 부여받는다. 직접 육체적인 간음행위를 하지 않아도 생각과 상상 속에서 하는 간음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누이에게서 근친상간적인 성적 충동을 느낀 한 남동생이 스스로의 죄의식에 시달린 끝에 자살하였다는 지명에 얽힌 설화가 있는 '달래고개 설화'.
얼마 전 이런 사진을 봤었다.
순록처럼 보이는 저 동물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자신이 죽인 동물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마주보고 살아야한다. 이 사진은 내게 '죄책감'이란 질문을 던졌다.
죄책감은 무엇인가. 내가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할 죄책감은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또 나는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고 있나. 그럼 그 죄책감의 크기는 얼마나 컸으면 좋겠는가.
나는 주로 마음의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본능이 앞섰을 때 섣불리 한 행동들. 그 행동들을 합리화 하기 위해 미사여구로 감싼 거짓말들. 원하기에 뺏었던 것들. 그러면서도 뺏기기 싫어한 이중적 모습. 모순, 모순, 모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충동적인 선택을 잘 내리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적어도 내게 빗대었을 때, 내가 그래왔으니까. 견고한 내 세계 속엔 타인은 없었다. 침대에 누워 누군가가 밥을 떠먹여주길 기다리지만, 정작 내 몸이 회복되었을 때는 남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 이기적인 생각들, 그로 인해 남들에게 줬던 마음의 생채기들. 그것들이 외려 내게 죄책감으로 돌아와 나를 아프게 한다.
지금은 책으로도 더 유명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거대하다라는 말로는 대변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고 super massive하고... 결국 우리의 인식 그 너머에 있는 크기의 우주 속에 초은하단 속에 은하단 속에 은하군 속에 은하계 속에 태양계 속에 지구 속에 아시아 안에 한국 안에 경기도 안에 여주 안에 00동 안에 어느 아파트 안에 내가 있다.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인 내가 거대한 우주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길어야 100년 남짓, 물론 2045년에 특이점이 와서 수명이 사라진다고 한들 언젠가는 죽을 내가, 유한한 존재인 내가 남에게 상처를 주고 그 업보로 인해 다시 내가 죄책감을 짊어지고 고통받으며 살아야 할까? 더 본질로 들어가서, 이 짧은 생에동안 내가 남들과 얼굴 붉히며 살아야 할까? 좋은 얘기만 하고 좋은 사람들만 만나도 100년이 짧은데, 난 왜 나쁜 얘기와 거짓된 말들로 남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걸까?
난,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탯줄들이 수많은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오늘도 난 다짐을 한다. '죄책감'에게 생명력을 줄 사건을 만들지 말자. 죽은 순록의 머리를 달고 다니는 순록이 되지 말자. 이 조그만 지구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살자. 함께, 같이, 재밌게.
차라리 내 삶이 잘 짜여진 각본이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게 어떤 거대한 존재가 만든 스토리였고, 이 모든 건 운명이었다면. 그럼 죄책감이 좀 덜하지 않을까. 내 실수도 후회도 회한도 전부 의도된 감정이었다면. 그렇다면 난 이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