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담담하게 어루만져주는 곡들
눈이 아름답게 내려서 그런지 이런저런 후회가 밀려와요. 다른 많은 후회들은 고칠 수 있어요. 더 열심히 할 걸이란 후회는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되고, 주변 사람들 챙기기도 지금부터 잘하면 돼요. 그런데 떠나간 연인에 대한 후회는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그렇다고 해서 막 다시 만나고 싶거나 미련을 갖는 건 아니에요. 그냥 덤덤하게 후회되고 덤덤하게 그리울 뿐이죠. 덤덤하게 그리운 마음을 담담하게 어루만져주는 곡들을 가져와봤습니다.
Novo Amor, Gia Margaret - No Fun
웨일스 출신의 뮤지션 노보 아모르. 다양한 악기를 다루고 프로듀서와 싱어송라이터로도 활약하는 그를 보면, 마치 '하림'이 떠오릅니다. 웨일스의 하림이라고 소개해도 될 것 같네요. 또 다른 뮤지션은 지아 마가렛, 시카고 출신의 싱어송 라이터이자 음반 제작자입니다. 이 둘이 만나 싱글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2019년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 곡인 [No Fun]은 잔잔한 포크송입니다. 코드도 두 개가 전부고 멜로디도 단순합니다. 템포도 느려서 자칫 처진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작곡가는 이 문제를 박자로 해결했습니다. 벌스를 자세히 들어보면 첫 번째 마디는 3/4박자, 두 번째 마디는 4/4박자로 진행됩니다. 후렴에서는 4/4박자로 계속 진행되고 2절 벌스가 시작되면 다시 3/4박자, 4/4박자가 번갈아서 나오죠. 처지는 느낌을 없애기 위해 박자를 한 박 당긴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곡을 들으면서 처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음악을 듣는다기 보단 음악이 상황에 스며든 느낌이었죠. 격정적으로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거나 한다기보다는, 멍하니 감상에 젖는 기분이었습니다. 덤덤하게 그리운, 멍하니 듣기 좋은 담담한 음악입니다.
Joshua Bassett - i'm sorry
조슈아 바셋은 가수보단 배우로 더 유명한 인물입니다. 배우 커리어를 먼저 쌓기도 했구요.
일상을 보내다가 문득 감정이 북받칠 때가 있죠. 일 중이거나 가족/친구와 함께 일정을 보내고 있어 북받친 감정을 꾹꾹 눌러 참아야 할 때. 그런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처량할 만큼 슬픈 가사이지만 기타 사운드는 온돌방보다도 따듯합니다. 차갑기도, 따듯하기도 한 노래여서 결국 미지근하게 들립니다. 그렇게 아프지도, 그렇게 덤덤하지도 않게요.
Kings Of Convenience - Cayman Islands
한국에선 편리왕이라 불리는 노르웨이 출신 듀오 킹스오브컨비니언스. 태풍에도 미동 없는 푸른 숲같이 잔잔하지만 견고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죠.
사실 [Cayman Islands]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때를 노래하는 음악입니다. 그런데도 왜인지 [Cayman Islands]를 들으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이 결국 과거가 될 걸 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 노래가 과거를 추억하게 만들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추억의 대상이 더는 곁에 남아 있지 않아서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소리는 사라지고 잔향만 남은 방 같달까요. 킹스오브컨비니언스의 노래는 이런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덤덤하게 주무르는 듯한. 그래서 담담하게 그리워하기 좋은. 자칫 잘못 빠져들면 더욱 그리워질지도 모릅니다.
billie marten - Bad Apple
빌리 마튼은 잉글랜드 출신 싱어송라이터입니다. 우리가 '싱어송라이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죠. 통기타를 치며 포크 음악을 하는. 한창 슈퍼스타k에 싱어송라이터 참가자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 이미지가 굳어진 거 같습니다. 빌리 마틴 역시 우리가 익히 생각하는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을 한 뮤지션입니다. 그녀의 장르 역시 잔잔하고 인디스러운 포크음악이죠.
[Bad Apple]을 들어보면, 기타와 보컬 뒤에 스산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밤의 공사장에서 들리는 경고음 같기도 하고, 어렸을 적 교회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선율 같기도 합니다. 한국엔 없지만 아이스크림 트럭이 저런 단음 멜로디를 내뿜으며 돌아다니기도 하죠. 이 단음 멜로디가 곡의 분위기를 몽환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벌스에서는 먹먹했던 바이브가 후렴구에서 밝게 변하는 게 와닿았습니다. 이렇게 힘들어도 언젠가는 다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주는 것 같아서요.
02:42초 이후로는 곡이 갑자기 우주로 향합니다. 전혀 다른 테마가 나오죠. 그럼에도 같은 결을 유지하는 이유는, 스산하게 깔리는 단음 덕분입니다. 노래를 쭉 들으면 힘들었다가 괜찮았다가 해탈하는 것 같아요. 덕분에 그리움이 저 아래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Keren Ann - Not Going Anywhere
케렌 앤은 러시아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계 자바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은 이스라엘, 어렸을 적 살던 곳은 네덜란드, 가수 활동은 주 파리와 미국에서 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역마살이 사람으로 태어난 듯한데요. 1974년생인 그녀는 2000년도에 첫 앨범을 발매한 후 현재까지 활동 중입니다.
새벽 3시에 이 노래를 듣고 '아, 이번 추천 글은 덤덤하게 그리워하기로 정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Not Going Anywhere]는 밝고 아름다운 음악입니다. 멜로디 역시 순수함을 지닌 아이처럼 맑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흰 눈이 쌓인 길거리를 홀로 걷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입에서 나오는 눈을 닮은 하얀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얀 입김을 닮은 눈이 땅으로 떨어지는 거리를 혼자 걸으며 이제는 정말 잊어보겠다고 다짐하는 느낌이에요. 상자에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았던 기억은 담아 평생 열어보지 않을 서랍에 넣어두고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하면서 상자만 떠올리는. 굳이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떠올리지 않는 기분을 주는 음악이랄까요.
개인적으로 귀에 익숙한 음악입니다. 하지만 가사는 이번에 처음 보게 되었는데요. 가사가 이렇게 먹먹할 줄은 몰랐습니다. 분명 처음엔 선명하게 보였었는데, 점점 흐리게 보였습니다. 나이가 드니 시력이 안 좋아진 거 같습니다.
이적 - 그런걸까
덤덤하게 그리워하기. 도대체 어떤 곡으로 마무리를 할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위로하는 노래는 저에겐 이 노래거든요. 저는 이 노래만 들으면 10년 전 그날이 떠오릅니다.
19살 때 사귀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대학에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습니다. 기숙사에 살았었는데, 불 꺼진 복도에서 핸드폰을 쥐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전화로 이별했습니다. 일본에 사는 일본인 친구였거든요. 헤어지고 좀 많이 힘들어하다가 그냥저냥 나름 시간을 잘 보내며 살고 있었더랬죠.
1학년 1학기 종강 후 휴학을 했습니다. 집으로 올라와 백수처럼 빈둥대며 핸드폰만 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날은 알바를 갈 때 혹은 담배를 피울 때뿐이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던 여름의 낮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러 밖을 나왔습니다. 그때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는데,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어놨었습니다. 뭐, 그때는 음악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어서 매일 음악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산을 쓴 채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듣고 있는데, [그런걸까]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날 담배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날 거의 30분을 밖에서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런걸까]를 들을 때면 그때의 그 비 냄새와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이 떠오릅니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서 망정이지, 참 부끄러울 뻔했답니다.
덤덤하게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실, 넘쳐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참는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 곡이었습니다.
이렇게 담담하게 그리워할 때 듣기 좋은 음악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처음으로 개인적인 얘기를 쓰게 되어 부끄럽기도 하네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덤덤하게 그리워할 때 듣기 좋은 노래는 무엇인가요? 댓글로 추천해 주세요! 노래 함께 나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