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힘이 더 위대한 이유
주말 오후 컴퓨터 파일 정리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정신없이 사느라 무관심했던 탓인지 노트북 속도가 부쩍 느려져 있었다. 급하게 할 일도 없어 여유를 잡고 문서 정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 오래된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퇴직일기’라는 제목이었다. 임원 시절 퇴직을 예감하고 힘들어했던 당시에 썼던 글이었다.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문서를 열어 첫 줄을 읽는데 목이 메었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수십 페이지 분량을 쉼 없이 읽어 내려갔다. 군데군데 오타며 앞뒤 맞지 않는 문장에서 당시의 애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며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는 처절함도 느껴졌다. 읽을수록 암울해졌다. 몇 년이 흘렀지만, 당시의 감정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듯 보였다.
‘글을 한번 올려볼까?’ 브런치 작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글감을 찾고 있던 상황이었다. 브런치에 글을 공개적으로 올려도 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 드는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오픈하는 데 대한 부담감이었다.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이 읽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까 염려도 되었다. 하지만 곧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로 보아 어차피 사람들이 많이 읽지도 않을 텐데 괜한 걱정을 하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글이 올라가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였다. 구독자 수가 점차 많아졌고 댓글도 달리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간의 힘들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왠지 지원군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힘내시라는 인생 후배의 응원부터 5년은 지나야 한다는 인생 선배님의 조언까지 해 주시는 모든 말씀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길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던 나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내친김에 브런치 공모전에 응모할 결심을 했다. 내 글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기준 분량을 채우려면 시간이 모자랐다. 정신없이 써 내려가며 글 한 편이 완성될 때마다 동시에 포털에 게시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하지만 밤잠 설쳐가며 가까스로 마감 직전에 출품했음에도 끝내 탈락하고 말았다.
무척이나 아쉬웠다. 퇴직 후 거듭되는 실패의 연속 중 또 하나의 실패가 더해졌을 뿐인데 여전히 실패 앞에서 좌절하는 나를 발견했다. 기대가 더 큰 실망을 만든 것 같았다. 며칠을 흐느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 글을 출판사가 제대로 읽어는 보았을까?’ 회사 다닐 당시의 비슷한 상황을 떠올려 보면 분명 주최 측은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 많은 출품작을 충분히 검토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출판사별로 채택 가능한 편수 제한 때문에 마음에는 있어도 선택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여지는 결과 외에 피치 못했을 사정이 있었겠다 생각하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내 원고를 다시 살피게 해야 했다.
곧바로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품했던 원고의 방향을 다시 잡고 프로필과 집필 의도를 넣어 기획안을 완성시켰다. 브런치 공모전에 참여했던 출판사는 물론 내 글과 컨셉이 맞는 출판사를 추가로 확인하여 명단을 작성하였다. 수십 곳 리스트 정리 후 출간을 원하는 출판사들부터 차례대로 원고를 보내었다. 시간차를 두었다가 답변이 없으면 다음 출판사들로 또 보내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투고를 한 다음 날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침 10시가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깜짝 놀랐다. 기획자와 통화를 하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책을 펴게 되었다. 공모전 낙선이 가져다준 공모전 이상의 결과였다. 내게 연락을 준 출판사는 규모로 보면 국내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출판사였다. 원고를 보내기 위한 리스트에 넣기는 했지만 보내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원고가 읽히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글이 그나마 내세울 점이라면 진솔함뿐인데, 진솔함만으로 책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형이 큰 출판사는 의사결정 단계도 복잡할 것이라는 내 판단도 틀리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는 의외의 것이 만들었다.
퇴직 후 나는 실패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마음이 바닥을 향해 추락하였고 결국 다시 회복하기 어려워 보일 만큼 깊은 나락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할 즈음이 특히 그랬다. 다 포기하고 도망갈까도 생각 중이었던 상황에서 희망 없는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은 뜻밖에도 누구인지 알지조차 못하는 사람들의 응원이었다. 내 글을 읽고 힘을 내라고, 나 역시 같은 여정에 있으니 함께 가자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로 인해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분들의 위로와 격려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전혀 다른 길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지난날의 나처럼 실패 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또한 크고 작은 도전 앞에서 망설이는 분들이 계신다면, 마음을 다해 응원드리고 싶다. 분명 과정 끝에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더불어, 지난해 나와 함께 공모전에서 고배를 맛본 8천여 작가들과, 그리고 올해 있을 공모전을 준비하는 작가들에게는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길을 만들어서 모두 좋은 작가가 되셨으면 좋겠다.
이번 출판 이후의 결과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동력이 되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이미 얻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다.
주변을 돌아보고 보듬어 주시는 따뜻한 분들이 계시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제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셨던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으로 인해 제가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신 것처럼 저 또한 감사함 잊지 않고 다른 분들께 따스한 마음을 흘려보내며 살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