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달라지고 말았다
이상하게 시름시름 기운이 없었다. 무더위의 끝자락이라 지내기가 한결 수월해야 하는데, 온몸이 쳐지고 두통이 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체력이 부쩍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힘을 내볼까 하여 근처 단골 식당에 갔다. 수년째 자주 다녔던 삼겹살집이었다. 식당 문을 들어서려니 출입문 위에 붙은 손글씨 안내문이 보였다, 물가가 너무 올라 지금까지 고기 주문 시 무료 제공되었던 후식 냉면을 부득이 2천 원에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보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올리셨네. 하긴, 진작 올렸어야지’
식당에 들어가 늘 먹던 삼겹살을 주문했다. 둘이 2인분의 양이었다. 여느 때처럼 상이 차려지는 동안 휴대폰을 보다가, 느낌으로 다 된 듯하여 젓가락을 집어 들려는데 살짝 놀랐다. 내어 주신 상추와 깻잎의 양이 평소와 비교해 눈에 띄게 적었다. 언뜻 보니 5장 남짓이었다. 보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 장마 뒤 야채값이 장난이 아니라더라’
다 구워진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힘이 좀 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판을 굽기 위해 남은 삼겹살을 불판에 올려놓으려는데, 또 한 번 당황했다. 접시 위 고기가 생각보다 적게 남아 있었다. 먹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라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 싶었다. 혹시나 하고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어렴풋한 기억으로 같은 가격에 고기양이 몇십 그램 적어진 것 같았다, 다시 먹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이 줄었네. 하긴, 다른 식당은 다 작년에 줄였지’
결국, 삼겹살을 2인분 더 추가했다. 주문받으시는 이모님이 나를 향해 물으셨다. “2인분이요?” 손가락으로 표시해 가며까지 확인하시는 폼이 내가 평소 추가하는 1인분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2인분이요” 나 또한 손가락으로 2인분임을 확인시켜 드렸다. 다시 먹기 시작하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동안 2인분 같은 1인분을 먹었어’
한창 먹고 있는데 사장님이 채소를 더 갖다 드릴지 물으셨다. 평소 빈 반찬을 알아서 챙겨주시는 모습과는 달랐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실은 안 괜찮은데, 좋아하는 깻잎을 먹고 싶긴 한데, 더 주문할 수가 없었다. 연일 물가 비상이라는 뉴스를 접하는 상황에서 주변 식당보다 저렴한 삼겹살을 먹으면서 비싼 야채를 더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당시도 물가가 폭등하던 상황에서 단골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물가가 너무 올라 가게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라고 푸념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다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사장님이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느껴지기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아 기다리시는 듯 보였다. 맛있게 드셨냐고 평소에 하시지도 않은 말까지 하셨다. 사장님 모습에 그냥 나가기가 멀뚱해서 한 말씀드렸다. “사장님, 가격 너무 늦게 올리셨어요. 덕분에 그동안 너무 잘 먹었잖아요” 순간 사장님의 얼굴이 어색하게 환해지시는 게 느껴졌다. 사장님 표정을 보니 말씀드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사는 동안 내게는 버거웠던 몇 개의 큰 산이 있었다. 그 산들의 공통점은 처음 마주할 때 느껴졌던 크기보다 지나며 느껴지는 크기가 훨씬 컸다는 점이었다. 알지 못하는 지형을 별다른 장비 없이 오르는 사이 나의 손과 팔은 긁혀졌고 신발은 벗겨져 나갔다. 다시 내려가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산을 오르며 느꼈던 심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중 가장 높고 험한 산이 퇴직이었다. 퇴직한 후에 내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무엇이든 상상 이상이었기에, 나중에는 예측하지도 대비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기며, 휩쓸려 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퇴직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일을 구상한다고 안 될 일을 되게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좌절만 커져 더 큰 실망만을 맛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퇴직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다시 그 시절 직장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다. 퇴직 전 내 눈에는 일만 보였다. 일에서 맛보는 성취감에 뿌듯해하고, 그를 통해 얻은 인정으로 고단함을 보상받았다. 이는 다시 일에 몰두하게 만들어 어느 순간 내 삶 전체가 일로 채워졌고 일 외에 또 다른 방향성은 생각조차 못 하게 되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지금의 내 눈에는, 퇴직자인 내 눈에는, 사람이 보인다.
얼마 전 과분하게 메이저 신문사의 칼럼니스트를 제안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겁이 난다. 하지만 용기를 내보려 한다. 부족하지만, 나의 글에,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을 담으려 한다. 퍽퍽한 세상을 기운 내며 살아가는 사람, 기운 내며 살아가는 동료에게 당신의 기운을 나눠주는 사람, 특별히 퇴직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쓰려한다. 그분들이 이전만큼 존중받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으려 한다. 사람이 보여서일까. 이제야 나도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