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뼈아픈 후회란 이런 것
며칠 동안 고민이 되었다. 연락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날짜는 가까워 오는데 단체대화방은 잠잠하기만 했다.
‘선배님, 모임 괜찮으세요?’ 참다못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만나기로 한 날이 코앞이라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식당 예약이라도 하려면 미리 확인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내 메시지에 누구도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신 휴대폰을 보았지만 잠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안 되겠어.' 반나절이 지나고야 대화방에 첫 글이 올라왔다. 내가 질문을 드렸던 선배님이셨다. 답글을 보자 걱정부터 앞섰다. 짧게 당신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셨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약속을 미루면서도 마음은 온통 선배님에 대한 근심뿐이었다.
선배님은 직장인 시절 잠시 나의 사수이셨다. 그분 역시 퇴직자로 나보다 한두 해 먼저 회사를 나오신 뒤 퇴직 후 우왕좌왕하는 나의 멘토가 되어 주셨다. 내일배움카드는 어떻게 신청하는지, 퇴직하면 건강보험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등 내가 알아야 할 내용에 관해 일일이 설명해 주셨다. 그 감사함이 커서 몇몇 사람이 철마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정을 나누던 차였다.
그런 선배님을 제대로 뵌 지가 반년이 훌쩍 넘었다. 올봄 함께 한 식사가 마지막이었다. 초여름에 만나자는 말만 남기고 기약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봄이 다 가기도 전에 대화방에 올린 선배님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얼마간 볼 수 없겠네” 당시에는 멀리 여행이라도 가시나보다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선배님은 위암 진단을 받으셨다. 봄과 여름 사이, 그러니까 마지막 뵌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 사실을 알게 되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로 현재까지 수술 후 입·퇴원을 반복하고 계신다. 그사이 아주 잠시 뵌 적이 있는데 수척해진 모습에 많이 놀랐다. 당신 얼굴이 보기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쳤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 것은 암 진단을 받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선배님은 회사를 떠난 뒤 5년 동안 단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느라 정신이 없으셔서 알면서도 미루었다고 하셨다. 퇴직 후 처음 한두 해는 직장인 시절에 받았던 습관도 있고 해서 생각 정도는 있으셨는데, 이후로는 그런 생각도 없어졌다 하셨다. 그러다 왠지 해야 할 것 같아 검진을 받았는데 우연찮게 암세포를 발견했다며 말끝을 흐리셨다. 더 늦지 않아 다행이라 말씀드리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삶이 얼마나 팍팍했으면 당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으셨을까.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간의 고뇌가 느껴졌다.
직장인 시절에는 건강검진을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했다. 매년 받을 수 있어 소중한 줄 몰랐고 대충 받기도 일쑤였다. 그래서 검진 전에 지켜야 할 수칙을 어기거나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선택 항목을 정하였다. 한창 젊은 나이라 건강에 자신이 있었고 혹여 증상이 있어도 해를 넘기기 전에 발견할 거라는 믿음도 한몫했다.
퇴직 후 건강검진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선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라 컨디션이 확실히 이전과 다르고 한두 곳도 삐걱거린다. 회사를 떠나면 왜 이곳저곳 아픈 곳이 생겨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가끔은 몸이 부실해지고 있음을 회사가 미리 안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렇지 않으면 퇴직과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기가 이리 꼭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가 않다. 수입이 줄어든 상황에서 월말 생활비를 합산해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데 여기에 내 건강 비용을 더하기가 주저된다. 건강, 무엇보다 돌보아야 함을 알고 있지만, 현실적인 고민 앞에서 자꾸 뒷전으로 밀어내게 된다. 가끔은 준비되지 않은 퇴직자에게 해마다 받는 건강검진이 호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선배님을 통해 절실히 느낀 점이 있다.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 한다. 이전처럼 회사가 나를 절대로 책임져 주지 않는다. 기억할 점은 내가 무너지면 내 주변도 함께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활동을 못 하게 돼 가계에 부담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나를 돌보느라 그들의 일상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퇴직자 본인의 건강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연결된 이들을 위한 마땅한 도리이자 당연한 책임이다.
안타깝게도 건강은 미리 챙겨지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의외의 곳에서 탈이 날 수 있다. 그래서 퇴직 전 준비해야 할 것은, 퇴직 후에 사용할 건강검진비이다. 퇴직 후 가장 정신이 없는 시기가 3년, 퇴직 후 루틴이 굳어지는 기간이 5년임을 가정할 때, 최소 3년에서 더 좋게는 5년 동안을 감당할 수준이면 좋겠다. 2년마다 받을 수 있는 국민건강검진을 포함하면 부담이 덜할 것 같다.
퇴직은 새로운 출발점이다. 여기에 건강에 대한 계획을 빼 두어서는 안 된다. 생활비도 아이 학자금도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건강검진비. 두 번째 인생이 피기도 전에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