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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May 06. 2022

베르사이유 궁전을 즐기는 기막힌 방법


베르사이유 공원(Parc de Versailles).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건물과 정원,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두막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거대한 초지다. 네모 반듯하게 다듬어진 나무들이 근위병처럼 호위하고 있는 대운하가 하늘과 맞닿을듯 뻗어나가고, 그 너머에 보이지도 않는 광활한 땅이 펼쳐진다. 아니, 펼쳐질 것으로 짐작해본다.


왜냐하면 궁전 건물과 정원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마어마한 면적이기 때문에 베르사이유를 처음 찾는, 그리고 다른 곳도 가봐야할 데가 많은 관광객들이  공원까지 제대로 경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몇날 몇일을 베르사이유에서만 머문다면  모를까. 최애 만화가 <베르사이유의 장미> 나는 오래전 20 일의 유럽 배낭여행 일정  하루를 꼬박  베르사이유 궁전에 쏟아 부었으나, 궁전과 정원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타임오버였다. 운하가 펼쳐지는 공원 쪽은 아폴론의 분수쯤에서 그냥 한번 바라보고 기념사진이나 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저곳은 가봤자 나무와 잔디밭 밖에 없으니 이렇게 보면 된다, 라는 여우의 신포도 같은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하루종일 돌아봤는데 아직 다 보지 못한 공원의 면적이 지금까지 본 것의 5배는 더 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그곳에서 조깅이나 산책을 한다는 이야기가 더 신박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조깅을 하는 일상이라니. 어릴 때 에버랜드 안에 있는 리조트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에 일찍 아직 개장하지 않은 정원을 전세낸 것 마냥 구경했던 기억이 있는데, 뭔가 그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상상해보았다. 그래서 다음에는 나도 꼭 베르사이유에 숙소를 잡고 아침에 궁전 정원에서 조깅을 해보리라 다짐했었다.


그 다짐은 16년이 지난 후,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실현됐다. 그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더 기가 막힌 방식으로.




불로뉴 숲에서 Baptiste 아저씨의 트럭을 타고 20분쯤 달리자 'Versailles'라는 그 이름도 설렌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베르사이유는 파리와는 다르게 어쩐지 조용하고 소박한 분위기였다. 예전에 왔을 땐 동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관심도 없이 기차역에 내려 오로지 궁전 정문을 향해 돌진했었는데. 차를 타고 찬찬히 돌아보는 베르사이유의 거리는 사치스러움의 끝을 보여주는 궁전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 동네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아저씨의 말에 다음에는 파리 말고 베르사이유에서 머물러보고 싶어요, 라고 16년 전 다짐했지만 이번에도 실천하지 못했던 나와의 약속을 괜히 한번 더 읊어보았다.


이번 여행이 파리에서만 일주일을 있는 꽤 넉넉한 일정이었음에도 그 16년 전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이유(핑계)는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왠만해선 호텔을 옮겨다니지 않고 한 곳에 머물기를 선호하는 나의 습성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그 원칙에 따르자면 베르사이유에서 최소 2박은 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 이 동네에 시간을 할애할 열정은 없었으며, 겨울이라 베르사이유 궁전의 풍경이 그닥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해버린 것도 있었다. 최근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숙박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정도라면 호텔을 옮겨다니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렇게 찾아본 가격은 하룻밤에 2000달러. 나는 신속히 생각을 접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잠을 잘 정도가 아니라면 16년 전의 다짐을 애써서 지킬 마음은 없었다. 그 바탕에는 '베르사이유 = 베르사이유 궁전과 정원'이란 공식과, '베르사이유 궁전과 정원은 지난번에 다 봤는데 굳이?'란 생각이 깔려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관광객스러운 생각이었는지 이날 하루가 끝날 시점에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부티와 함께 다시 찾은 베르사이유 공원


Baptiste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간 곳은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문이 아닌, '베르사이유 공원'으로 곧장 갈 수 있는 옆문(?)이었다. MBTI가 E로 시작할 것 같은 아저씨는 주차비를 내는 그 잠깐의 시간에도 관리인과 수다를 떠셨다. 나는 그저 베르사이유 궁전에 이렇게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동네 사람들이 조깅을 하러 갈 때는 아마 이런 길로 가는 것이겠지. 16년 전의 다짐을 반만이라도 지키게 된 것 같아 설렜다. 마치 프랑스 사람들만 아는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와인 마실거에요?"


아저씨는 피크닉 준비를 하시면서 와인병을 꺼내며 나에게 물었다. 이번 외승 프로그램에는 말 타는 것 만큼이나 기대가 됐던, 막간의 스낵타임이 포함돼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봤던 사진에는 와인을 마시는 장면도 있었는데 나는 이따 또 말을 타야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안 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는 그런거 없었다. 물은 와인이 없을 때나 마시는 거라지.


날씨가 좀 춥고 흐렸으나 프랑스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난로를 켜고 목도리를 둘둘 만채로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다. Baptiste 아저씨는 간이 테이블을 펼치고 그 위에 테이블 보까지 씌운 후 예쁜 피크닉 바구니를 갖고 나오셨다.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사진은 그냥 컨셉이 아닐까 의심도 했었는데, 그리고 오늘은 손님이 나 하나 뿐이니 대충 준비하지 않았을까 했었는데 프랑스 사람들의 감성은 그런 꼼수를 용납하지 않는 듯 했다. 석달짜리 승린이가 음주승마까지 하면 안되겠기에 나는 와인을 2잔만 마시는 것으로 이 사랑스러운 프렌치 피크닉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Baptiste 아저씨의 프렌치 피크닉 갬성




우리가 프렌치 갬성 피크닉을 즐기는 동안 부티와 Baptiste 아저씨의 말도 풀을 뜯어먹으며 쉬고 있었다. 묶여있던 자리 주변에는 마음에 드는 풀이 없었는지 불로뉴 숲에서만큼 신나게 먹진 않길래, 손수 부티의 취향에 맞는 풀을 찾아와 입에 넣어주었다. 오후에도 마저 잘 부탁한다는 풀 뇌물이었다. 맛있게 뇌물을 받아 먹은 부티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처음 만났을 땐 허락하지 않았던 셀카에도 다정하게 동참해주었다.


이제 'canter를 실컷 할 수 있다'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드넓은 초원으로 갈 차례였다. 정말로 베르사이유 공원에는 그냥 산책이나 조깅을 하러 온 동네 주민들이 많이 보였다. 관광객이지만 이쪽 공원이 궁금했는지 들어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도 있었다. Baptiste 아저씨는 또 그 꼴을 그냥 못보고 굳이 가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오셨다. 아마 한국인이었다면 마을 이장 자리 정도는 꿰차셨을 것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Bap반장님이었다. 아무튼 아저씨 덕분에 더욱 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베르사이유 공원에서의 외승을 시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두막 옆을 지나 정말 끝없이 펼쳐진 들판으로 나갔다. 여기는 제 아무리 베르사이유 궁전 덕후라 할지라도 걸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면적이었다. 아주 오래 전, 프랑스 왕족과 귀족들도 이곳에서 말을 타고 달렸겠지. 말들이 좋아하는 풀과 부드러운 흙, 그리고 실컷 canter를 하기에 거칠 것 하나 없이 곧게 뻗은 길. 이 모든 것이 수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서 온 승린이가 이곳에서 canter를 배우고 있다.


Baptiste 아저씨가 달릴 때 앞지르지 말고 자기 뒤에 있으라고 했는데, 부티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더 달리고 싶어서 그런건지 자꾸만 아저씨의 말을 추월하려고 했다. 그러다 나와 부티 둘다 질주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치고 나가 버렸는데, 아저씨도 그 순간에는 그냥 달리도록 내버려두셨다. 나는 어? 이래도 되나?? 될까?? 에라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며 부티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정말로, 37년 인생 중에 가장 행복했던 30초였다. 대학 합격했을 때보다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부티가 너무 빨리 달린다싶어 정신 차리고 얘를 다시 진정시키기 전까지의, 부티와 함께 달렸던 그 베르사이유 숲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시공간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37년 인생 중 가장 벅차올랐던 순간. Merci, Monsieur Baptiste!




그렇게 한참을 달려 베르사이유 궁전 운하의 가운데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저 멀리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궁전이 보였다. 그 옛날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이날에서야 나는 내가 베르사이유를 '다 봤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주 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베르사이유를 결코 '다 봤다'고 할 수 없었다. 승린이에서 벗어나 좀 더 빠르게, 좀 더 오래, 좀 더 자유롭게, 이곳을 말과 함께 달릴 수 있기 전까지는.


프랑스 파리에 온 것이 벌써 4번째이면서도,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정원을 또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그건 이곳을 경험하는 방법을 한 가지밖에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르사이유에 숙소를 잡겠다는 16년 전의 다짐 역시 금새 잊혀질 수 밖에 없었을테다. 하지만 승마를 알게 된 덕분에, 베르사이유 궁전 근처에서 자고 아침에 공원을 찾아 조깅을 하겠다는 꿈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나마 이루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꿈 같았던 외승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온 나는 Baptiste 아저씨에게 이메일을 썼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번주에 하루 더 탈 수 있는 날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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