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나라의 하루 코로나 확진자 수는 10만 명을 찍었다. 나는 일주일 자가격리를 해야 했지만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재택근무로 거의 모든 일이 해결됐고 귀국 후 의무적으로 하게 돼 있는 두 번의 PCR 검사에서도 음성 판정이 나왔다.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 출퇴근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시차적응에 쏟을 수 있어서 의외로 좋은 점도 있다 생각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국적 따져가면서 감염시키는 것도 아니건만 이 시국에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니 정말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 부모님은 '안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잠시 내비쳐보이시다 나의 똥고집을 꺾지 못한다는걸 금방 깨달으시고는 매일 생존신고만 잘해달라고 당부하셨다.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부러움과 약간의 존경심(?)을 표했다. 그것이 100% 긍정의 의미만 있진 않은 것 같다고 느낀건 나 스스로도 '이 시국에 해외여행을 가는 것'에 대해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 많은 번민(?)을 뒤로 하고 이번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돈은 있을 때 써야 하고, 여행은 갈 수 있을 때 가야 한다'며 파리행 비행기를 거침없이 결제했던 3개월 전의 나 자신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 외승을 위해 일주일에 4타임씩 기승 연습을 했던 나는 일주일간의 돈잔치 여행 이후 긴축재정 모드에 들어갔다. 우선 승마장 가는 횟수부터 절반으로 줄였다. 회원 할인에 지역화폐 찬스까지 써도 4타임이면 기승비로 일주일에 수십만원이 든다. 줄였다고 해도 처음 승마를 시작했을 때 타던 만큼으로 되돌아간 것 뿐이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제 1타임 45분은 너무 짧게 느껴졌다. 영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나는 결국 통장 잔고가 마를 때까지 일단 계속 타보자고 생각했다.
승마에는 '귀족스포츠'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무엇보다 비싼 이용료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국민소득 2만불 이상이면 골프, 3만불 이상이면 승마를 즐긴다는 법칙도 있다(4만불 이상이면? 요트가 등장한다!). 승마를 생활스포츠로 즐기는 프랑스, 영국, 독일 같은 나라들 모두 1인당 GDP가 3~4만불 정도이니 완전 틀린 말은 아닌듯 하다.
우리나라도 2017년부터 국민소득 3만불 시대가 시작됐지만 승마에 대한 넘사벽 이미지는 여전하다. 그런 반면, 요즘들어 카톡 프사나 인스타그램에서 골프를 치는 내 또래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푸른 하늘과 정갈한 잔디밭을 배경으로 예쁜 골프의상을 입고 드라이브샷을 날리는 사진이 복붙한 것처럼 올라오곤 했다. 코로나 이후 실외에서 다른 사람들과 별로 부대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스포츠, 예를 들어 테니스도 요즘 유행이라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승마는 그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골프도 승마만큼 돈이 많이 들텐데??라는 생각에 찾아보니 확실히 승마가 비용이 비싸다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골프뿐만 아니라 스키, 자전거, 스쿠버다이빙, 서핑 등등 취미로 하는 운동에 장비와 이용요금을 아끼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에 비하면, 승마가 아직 대중화되지 못했다는 것이 단지 가격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거기에는 '말을 탄다'는 것에 대한 묘한 두려움도 포함되는 듯 하다. 내가 승마 이야기를 하면 나오는 여러 가지 반응 중에 '말이 무섭지 않냐'는 질문도 꽤 많이 등장한다. 나 역시 아무리 동물을 좋아한다고 해도 처음 승마를 시작했을 땐 선뜻 다가가기가 망설여지곤 했었다.
말들이 덩치만 컸지 나뭇가지 흔들리는 것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는 순 쫄보들이란걸 알기 전까진.
매 주말마다 승마장을 가고 유럽으로 외승을 다녀오는 돈잔치를 하고 있지만, 나는 금수저도 뭣도 아니다. 그냥 승마가 정말 재밌고 좋아서 지금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몰빵하고 있는 것 뿐이다. 월급이 나오면 고스란히 승마장에 갖다 바치고 있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해도 사실은 진짜로 거의 그렇다. 대신 쇼핑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고, 마시는 술의 단가가 낮아졌으며, 가끔 혼자 고급음식점에 가서 플렉스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홀릭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재즈댄스를 할 때도 이 정도로 즐기면서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몰입할 수 있는 취미가 있어서 좋겠다, 부럽다 이런 이야기도 가끔 듣는다. 그러면서 보통은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여기서 '좋아하는지'는 '잘하는지'로 바꿔서 읽어도 된다. 한참 신나게 승마 이야기를 하고 나면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게 어색했다. 왜냐면 나 역시 내가 뭘 좋아하는지 혹은 잘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취미든 또 다른 재능이든,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시도는 참 여러가지 많이 했었다. 책까지 사가면서 와인을 공부하기도 했고 <퀸스갬빗>을 보다 삘 받아서 체스를 배우기도 했다. 사실 지난 파리여행의 쇼핑 위시리스트에는 '체스판'도 있었는데, 승마를 시작하고 난 후 체스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은 급격히 식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알고 싶다면 계속 무언가를 시도해보는 수 밖에 없다. 그게 싫다면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점쟁이를 찾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덕질하듯 주말 아침이면 어김없이 승마장에 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다들 불금을 보내는지 토요일 아침의 승마장은 유독 더 한가로웠다. 승마 스케쥴 예약표의 주말 오전 8시, 9시 타임에는 늘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NPC(Non Player Character) 같았다는 소감을 전해주신 분도 계셨다.
그러던 어느날, 승마장 감독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동호회에 가입해보는게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