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의 시대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즐기던 것들이 너무도 소중하게 그리운 시절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읊조려 보았을 T.S. 엘리오트의 "잔인한 4월". 유럽을 대표하던 시인은 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인류가 공들여 쌓았던 문명들과 복락의 시기에 인간들이 나누었던 인간성이 파괴되고 말살되는 것을 보고, 종전 후의 유럽을 "황무지"라고 슬피 불렀다. 지금이 딱 그러한 황무지의 시기인 것 같다.
늘 이맘 때면 즐기던 소소한 일상들을 이제는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6월, 1월부터 시작된 바이러스 공격대의 공격이 좀처럼 끝나질 않는다. 누군가의 간절했던 바람처럼 "이 모든 것이 꿈이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나 또한 간절하게 그랬으면 좋겠다.
신록이 눈부시던 5월 이면 많은 수의 대학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음주가무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탓에 캠퍼스 여기저기에는 바커스 神이 축복이라도 내린 냥 알코올 냄새로 그득했고, 학부 내내 골머리를 싸잡게 하던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낱 안주거리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성차별의 논란으로 사라진 풍속이지만 "5월의 여왕"이 선발될 때는 은연중에 단대 별, 과 별, 심지어 학년 별 눈치보기도 만연했었던 생각이 난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바뀌긴 했지만 매 년 이맘 때면 대학가의 자유분방함을 그리는 뉴스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소소한 에피소드들과 더해져 우리에게 어김없이 전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흔하디 흔했던 꽃구경 조차 할 수 없는 역경의 시절이다. 슬슬 시작된 폭염에도 마음 놓고 해변을 거닐 수도 없다. "잔인한 4월"을 슬퍼했던 구라파의 시인이 1차 대전을 겪으며 목도한, 인류문명의 파괴와 인간성의 말살을 통해 느낀 "황무지의 시대"에 버금가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공포 앞에 지구 상에는 사재기, 줄 서기, 매점매석, 감염 통계 은폐와 조작, 국가 간 외교적 배신, 인종 간의 혐오와 배척, 국민을 버리는 국가지도자들, 정치적 무대책과 사회적 폭동 등등 갖은 부정적인 모습들이 표출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인류가 "문명, 교양"이라는 고급진 용어를 사용해 애써 눌러왔던 동물적 감각의 이기적인 인간 본성들이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나 버리고 있다.
계속되는 긴장감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번아웃이 올까 걱정될 무렵이다. 도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나 자신도 서서히 지쳐감을 느끼고 운명대로 되어 버려라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종종 생겨난다. 그러는 피폐의 와중에도 인류의 가능성을 믿기에, 한국인으로서의 억셈을 믿기에, 조금만 더 참고 조금 더 힘을 내자고 말하고 싶다. 주변의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어 서로를 추슬러줘야 할 것이다. 인류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모두를 위한 개인생활의 양보를 감내해야겠다.
오염으로 인한 지구 멸망과 다른 별로의 인류 이주를 다루었던 <인터스텔라> 영화의 대사가 떠오른다.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