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음식 기술자"가 유명세를 탄 이후에 급속도로 조립식 음식이 많아졌다. 정확히 그 음식이라기보단 사람들의 혀를 속이는 비주얼과 그 음식'맛'을 갖춘 이미테이션 음식이라고 불러야 정확할 것이다. 여하한 그가 출연한 방송에 소개되거나 그의 이름이 걸린 프랜차이즈는 연일 대박을 이어가고 있으니, 꼰대라고 지적받는 까다로운 내 혀를 탓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까탈스러운 입맛을 맞춰주는 곳 중에 한 곳을 소개한다.당연스럽게도 이 집에 대한 호불호는 존재한다. 그렇긴 해도 맛의 호불호를 떠나서 가성비와 다소 과식을 해도 속이 편하다는 점은 크게 이견이 없을 성싶다.
언양 읍성과 맞닿은 곳에 있는 <동부분식>은 삼십 년을 훌쩍 넘긴 노포이다. 2018년 미나리 김밥으로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솔직히 이곳이 자랑하는 김밥과 칼국수는 특별히 내세울만한 요란한 맛이 없다.따라서, 절대 특별하거나 현란한 맛의 기교를 기대하고 방문해서는 안된다.
이 집의 가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김밥 맛이고 딱 칼국수 맛을 갖춘 것에 있다.
할머니들이 차지한 주방은 100% 오픈형이다. 유리든 커튼이든 아무것도 손님과 주방 할머니의 소통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런 개방형인데도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있어도 음식이 급히 나오질 않는다. 왜냐하면 칼국수를 끓여내는 솥이 하나뿐이고 김밥 담당 할머니가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손님들은 칼국수가 끓을 시간 동안 에피타이저로 김밥을 주문한다.
김밥 주문과 동시에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 셀프로 가져다 먹는 냉면 무처럼 길쭉하게 썰어 낸 무김치와 시원한 보리차이다. 특히 보리차는 예전 역전다방에서 하루 종일 난로 위에서 우려난 진국의 맛과 향을 담고 있다. 오차? 엽차? 어떤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름인들 이 추억 돋는 맛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적당한 숙성과 적당한 간간함을 가진 무김치의 청량한 맛도 어린 시절 찬 밥에 물 말아 급히 먹었던 토종 깍두기의 맛을 떠올린다. 실로 밥도둑이라 이름 붙여줘도 전혀 손색이 없는 맛이다.
주문을 하고 족히 십 분은 지나야 나오는 김밥, 정말 놀라운 것은 진짜로 김밥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풍 때 엄마가 싸주시던 김밥, 입맛 없을 때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김밥... 정말 그 김밥이다.
위에 뿌려진 참깨는 손으로 대충 빻은 듯 굵기가 제 각각이지만,놀라운 점은 참깨가루의 이런 불규칙함이 입 속에 들어가서는 다른 재료들과 어우러져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맛을 유지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김밥 속이 미나리인지 시금치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 그저 그냥 김밥 맛이라서 재료들의 맛들이 따로 구분이 안될 정도로 조화롭다.
모든 재료가 적절히 조합된 맛!
서른 그릇 남짓의 칼국수 대접이 주방 테이블에 올려지고 노련한 할머니의 솜씨는 정확히 삼십 등분으로 면을 담아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자용과 여자용의 양을 조절해 담아내는 것이다.
요즘은 기계 칼국수가 많다. 그것들은 면발이 균일하여 비주얼 면에서는 훨씬 단정하다. 하지만 이곳 동부 분식의 면발은 수제품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투박하다.
수제비라 우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두꺼운 면발도 보이고, 소면이라 우겨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가느다란 면발도 보인다.
멸치 내장의 쓴 맛과 비린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육수이다. 함께 한 친구의 것을 한 젓가락 뺏어 먹어도 위장에 부담이 없다. 원래 식사량이 많지 않은 체질이라 이 정도 양이면 웬만한 음식점의 음식이라면 속이 더부룩하기라도 하련만, 김밥에 칼국수가 더해졌는데도 부담이 없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사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은근히 부아가 올랐었다. 배가 고팠던 탓도 있긴 했지만 주방, 홀, 김밥을 담당한 세 분의 할머니들은 너무 느렸다. 주문을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반응도 크게 없고, 게다가 관절염이 있으신지 걸음조차도 부자연스러우시다.
'오늘 중에 식사를 할 수는 있을까?
할머니들이 내 순서와 주문을 기억이나 하실까?'
걱정이 들만큼 할머니들은 느리고 무관심하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니 정작 조급해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젊은이들도 다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도 없다. 동행한 이들에게 오차 물을 퍼 나르고 무김치도 두 번, 세 번 가져다 먹으며 앞사람들과 얘기를 한다.
빠름의 시대에 익숙한 세대, 그러나 이곳의 느림이 가져다준 여유는 오차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무김치와 깍두기에 대한 기억도 되살려냈다.
불규칙한 무김치의 두께와 김밥에 뿌려진 참깨가루, 게다가 굵기가 제 각각인 혼돈의 칼국수 면발은 불규칙함이 만들어 낸 조화로운 식감을 만들어 냈다. 놀랍게도 이 작은 식당 안에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이 존재했다. 굳이 이곳에 존재하는 정형화된 규칙성과 빠름을 찾으라면, 수년간 그대로인 가격과 테이블의 그릇을 돌아보고 즉시 셈을 해내는 할머니의 계산 능력이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