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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Aug 03. 2020

라면 (1)

60분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라면

석남터널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가지산을 올라 봅니다.
석남터널 삼거리 능선을 지나고, 중봉을 오르는 데크계단이 막 시작되는 곳에 영락없는 '하꼬방' 모양새를 갖춘 대피소와 막걸리를 겸한 복합 간이매점이 있습니다.

"석남재대피소간이매점"
들어가서 라면 한 그릇을 시키니 주인장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으시고 "1시간 기다려야 됩니다"라십니다. 마치 고목나무와 대화하듯 참으로 무미건조하게 답을 던져주십니다.

그깟 60분 특별히 바쁜 것도 없고, 딱딱한 나무의자이지만 노곤한 엉덩짝이 개중에 좋은 곳을 색해 이미 앉아버렸고, 배낭마저 벗어던진 터라 두 말 않고 "예~"하고 기다리기로 합니다. 그런데,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제법 영양가 있어 보이는 라면 한 대접이 맛있는 묵은지랑 함께 나옵니다.

주인장께서 말씀하신 1시간의 기다림이라는 막연함에 지레 포기했더라면 이 맛있는 라면을 맛볼 수 없었겠지요.

마지막 남은 한 올의 라면에, 온 정성을 모아 젓가락 신공을 가하는 즈음에 두 분의 등산객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라면을 시키는데 주인장의 반응은 한결 같이 "1시간 걸립니다"입니다.


두 분은 갈 길이 바쁘신지 컵라면으로 서둘러 메뉴를 바꾸십니다. '10분 정도 기다리시면 끓인 라면 나올 겁니다'라고 코치를 해주고 싶지만, 정작 '하꼬방'주인장의 속내를 알 수 없기에 조용히 컵라면을 받아 드는 그들을  지켜보며 마지막 남은 제 몫아치를 해치웁니다.

1시간... 60분!
하꼬방 주인장은 세속의 긴 시간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권할 수 있는 기다림 중에 가장 간단한 시간을 의미한 말씀이었고, 바쁜 등산객들에게는 도저히 기다릴 수 없는 미지의 시간이었으며, 오라는 곳 없는 저 같은 백수 한량에게는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을 잠시의 여유로움이었습니다.


그나저나 하꼬방 벽면 한가운데를 차지한
"순아! 사랑해"... 낙서
사랑고백은 잘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네요.


순이 씨! 어찌 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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