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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Feb 07. 2022

영남알프스 노매드 (알프스의 시작)

영남알프스의 시작은 고사리

부산 지역은 한겨울에도 눈 구경이 힘든 곳이. 그렇다 보니 거의 사계절 내내 자유등반과 암벽등반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당연하게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자생 산악회가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곳이 1958년 창립된 <대륙산악회>이다.


대륙산악회

대륙산악회는 그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업적을 가졌는데, 그중에서도 필자에게 꼽으라면 단연 빠뜨릴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사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만큼 많은 족적을 한국 산악계에 남겼다).

1964년 부산 금정산 남문 시민안내등산(펌. 대륙산악회)
첫째, 지리산 칠선계곡 루트를 비롯한 지리산 등산로 개척
둘째, 등산의 대중화를 꾀해  전국 최초로 안내 등산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 때 전국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묻지 마 관광"이라는 변태적인 형태가 나타나기도 해서, 그 오명으로 관광버스 업계가 지탄을 받은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부산 시민회관 앞에서 휴일 나들이를 나선 시민들이 정차된 버스의 목적지를 보고 승차하면, 관계자가 간단한 등반 교육과 목적지까지 리딩과 가이드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지금 성행하는 테마관광을 이미 60년 대에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을
작명하고 대중화시킨 공로이다.


대륙산악회의 창립 멤버인 성산(1934~2010) 씨와 초기 회원인 故 곽수웅(1944~2019) 씨가 함께 작명하였다는 것이 이견이 없는 정설이다.

두 사람은 1971년 일본 후쿠오카 산악연맹의 초청으로 <대륙산악회 일본 북알프스 원정대> 대장과 부대장을 맡아 22일 간 "호다카 다게(3,190m)"를 무사히 등정했다. 힘겨운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사람은 재약산 아래 화전민의 삶터이자 너른 억새 들판(약 65만 평)이었던 <사자평 고사리마을>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억새로 지붕을 엮었던 화전민들의 집은 70년대 지붕개량사업으로 탈바꿈 했다. 등산객들이 많아지자 안주의 가짓 수도 많이 늘어났다.


등산로 개척을 위해 재약산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닌 터라, 두 사람은 쉴 곳을 찾아 화전민들이 모여 삶터를 일군  '고사리 마을'에 찾아든 것이다. 신축한 지 얼마 안 된 '고사리 분교'에는 아직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낑낑대던 산이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이터에 불과했다.

자타공인 그 자신이 "부산의 큰 산"이라 불렸던 '성산(본명:성용철, 무엇이든 이름짓기를 좋아하셨던 분이다)'씨는 저들 중에서 훗날 자신들을 능가하는 훌륭한 산악인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기울자 '고사리 분교'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긴 하였으나 워낙 너른 들판이라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화전민이었던 막례 할머니가 직접 담근 걸쭉한 농주를  파는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전쟁통에 아들을 잃은 막례 할머니는 가끔씩 들러 주는 선 등산객들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빨간 고무 물통 다라이(대야)의 묵직한 뚜껑을 열자 대추, 곶감, 밤, 사과, 배, 누룩이 둥둥 떠있고 그것들의 조합이 빚어낸 발효 거품이 부글부글 끓고 있 농주가 그득했다.

따뜻한 두부 한 모와 시원한 김치를 내어 온 할머니는 여기저기 찌그러진 누런 양은 잔 두 개와 조그만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를 내어 준다.

알아서 마시고, 알아서 계산하라는 의미이다.

산사람의 계산법이다.


규모의 알프스, 가치의 알프스

주거니 받거니 몇 순배의 농주는 얼마 전에 다녀온 원정을 생각나게 하였다. 일본의 북알프스는 혈기왕성한 산악인인 그들에게는 실로 부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해발 2,000m가 넘는 봉우리가 66개, 해발 3,000m가 넘는 봉우리가 16개나 되는 엄청난 규모와 높이는 실로 넘사벽이었다.


 순배의 농주가 도는 가운데 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들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는 하얀 눈이 쌓인 듯 일렁이고 있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두 사람은, 왜 우리에게는 알프스라고 부를 만한 멋진 산이 없는 것인지 시샘 아닌 시샘이 일었다.

일본의 북알프스에 기죽기 싫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기투합하였다.

“19세기 영국인 측량기사 해리 고든이 알프스 산맥을 빗대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을 지었다. 우리는 이곳을 영남 알프스라 부르자.”

특정 구역 안에 1000m 이상의 고봉이 일곱 이상이면 알프스라 칭한다.

영남 알프스비록 7개(*당시에는 고헌산, 문복산을 빼고 7봉이라 불렀음)에 불과한 1,000m급의 낮은 고산이 둘러싼 일대이지만, 그들에게는 쉬이 접근할 수 없는 해외의 산보다는 그들의 넘치는 등반 욕구를 언제든 해소시켜 줄 알프스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산들이었다.

규모보다는 가치에 집중한 것이다.

영남알프스 일대는 북알프스에 비해 눈도 잘 오지 않는 육산 밀집지역이지만, 미답지를 하나하나 지워 가는 동안 그들은 준수하고 날렵한 암봉과 암릉을 많이 경험하였다. 다양한 암릉 코스와 어프로치가 쉬워서 근교 산행지로서는 흠잡을 곳이 없는 명품코스라 생각되었다. 힘든 감이 없진 않지만, 당일 산행지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온종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걸을 수 있는 종주산행도 가능하고, 곳곳에 샘터가 있어 취사 야영에도 제약을 받지 않으니 해외 원정등반을 떠나는 훈련캠프로도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도심과 가까운 입지 조건은, 원정에 대비한 훈련지로서 매우 훌륭했다.  산에서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돌발상황 시 탈출을 수시로 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남알프스 실로 매력 투성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영남알프스가 있다.


자존심과 자부심

이렇게 <영남알프스>가 탄생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 서먹한 단어의 조합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요즘에는 줄여서 "영알"이라고 까지 불리니 남성의 고환에 빗대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알프스라고 하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 오스트리아까지 광활하게 뻗은 눈 쌓인 하얀 산맥을 가리키는 것인데, 고도만 어느 정도 높다 하면 너도나도 알프스를 갖다 붙이니, 일본과 뉴질랜드 그리고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에 까지도 알프스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일본을 흉내 낸 왜색 알프스라서 자존심이 상한다"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고유한 산 이름에 남의 나라 이름을 갖다 쓰면 자부심이 없어 보인다"라고 폄하 하기도 한다.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이름은 사람이 붙였지만 산은 오래도록 거기에 있었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산은 산이다.

오리지널 알프스를 비롯해 다섯 군데 알프스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어느 곳도 "알프스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도 아깝지 않은 풍광을 지닌 곳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영남알프스"라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고 대부분 일치한다. 사시사철 다른 모습으로 변화무쌍하고, 도심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대자연이라는 이유이다.


사자평의 고사리 새순 같았던 한국 산악계는 이제 세계 어느나라의 산악계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고사리 마을을 베이스캠프 삼아 열심히 훈련했던 부산산악인 곽수웅 씨가 1977년 고상돈 씨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가까이에 알프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7울주세계산악영화제, 곽수웅 선생님(右 모자)과 함께. (2019년 소천)

다음 이야기 : 가지산(加智山)! 지혜가 더 해지는 山.



*오래 전의 전언과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정확성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실존하는 단체와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므로 일부 각색된 글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혹여, 내용이나 필자의 기억에 중대한 오류가 있거나 수정해야 한다면 댓글로 지적해주시면 검토,확인하고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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