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등산 관련 기자가 재약산을 가리켜 "산세가 부드러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라고 적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필자가 영남알프스 일원을 다녀 본 바로는 운문산과 맞먹을 정도로 최고의 난이도를 지닌 산이 재약산이다.
물론, 그 기자 분이 등산의 전문가일 수도 있고, 쉬운 코스를 택한 것일 수도 있다. 고사리마을을 오가던 임도를 택했거나, 아니면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천황산에서 접근했을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능동산을 들머리로 하는 작전도로를 통해 다녀 갔다면 충분히 재약산의 부드러운 산세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배내골 베네치아 산장이나 주암계곡 루트, 표충사 진불암, 혹은 얼음골을 들머리로 택한다면 결코 초보들이 쉬이 오를 수 없는 난코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급경사와 깨진 돌, 너덜겅과 덩굴 숲, 그리고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고라니와 뱀들, 무엇보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것은 미처 소화되지 못한 나무 열매와 새의 깃털 같은 것들이 섞여 있는 담비와 멧돼지의 배설물이다.
재약산 층층폭포 최하단에서 탁족을 즐기는 산꾼
산행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 늘 얘기해주는 충고이지만, 결코 쉬운 산은 없다. 하물며 서울시의 뒷산 이랄 수 있는 북한산이 전국에서 년간 조난 사망률이 제일 높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암벽등반 사고 외에 실종 사고).
등산은 지족불욕 (知足不辱)을 수행하는 고상한 행위이다. "분수를 지키는 이는 욕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으니 산에서 의도하지 않은 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마음가짐을 늘 겸손, 또 겸손하게 가질 일이다. 그제야 비로소 부드러운 재약산을 만나게 될 것이다.
흥덕왕의 약방, 재약산
사실, 영남알프스 9봉 오르기 인증 이벤트가 있기 전의 재약산은 일반 등산객들이 쉬이 찾는 산은 아니었다. 대중교통의 불편함과 산이 지닌 엄청난 무게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왕의 약방이었던 그 보배롭고 영험한 기운이 우주를 오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모종의 작용을 한 것이리라.
신라 흥덕왕의 셋째 아들이 나병에 걸렸을 때,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던 중, 재약산 아래에 있던 죽림사(지금의 표충사) 경내에 있는 '영정 약수'에서 몸을 씻고 그 물을 마시자기적처럼 치유가 되었다. 그때 안내를 했던 도인이 산세를 살핀 후 왕에게 고하길, "이 산은 널린 풀 꽃나무, 흐르는 물 모든 것이 약초나 약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라며 부복했다. 이 말을 들은 흥덕왕이 "실을'재', 약'약'을 써서 <재약산載藥山>"이라고 칭하였다. 단순히 약이 "있다거나, 가졌다" 정도의 수준을 넘어 '약을 싣고 있는 산'이라니, 실로 엄청난 약빨을 지닌 산이었나 보다.
그런데, 신라사를 찾아보면 흥덕왕은 후사 없이 승하했고, 그 뒤를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을 등에 업었던 혜공왕이 즉위했다. 병약했던 흥덕왕의 왕자들이 일찍 죽은 것인지 그저 전설의 주인공으로 흥덕왕이 발탁되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전설을 확인하는 순간, 그 흥미진진한 신비로움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천황산에서 바라 본 재약산 북사면과 사자평 일부
고사리 마을과 사자평의 눈물
착취와 수탈, 인간 군상들의 경쟁에서 밀려 난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고려였는지 조선이었는지 그 뿌리조차 알 수 없는 서럽고 고단한 백성들은 화전을 일구고, 깊은 골짝에서 캔 약초를 언양장이나 밀양장, 청도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조선이 망하고 왜놈들의 세상이 되었지만, 그 터전 조차도 오롯이 그들만의 것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 왜놈들은 사자평원의 화전민들을 쫓아내고 그곳에 스키장을 만들 목적으로 벌목과 정지작업을 하였다.
조상 대대로 그 땅을 지켜 오던 약초꾼은 주먹밥 하나를 얻기 위해 자신들의 밥줄이었던 풀뿌리를 캐내제거해야 했고, 숯을 굽던 나무꾼은 산 아래 일본인 사업가가 운영하는 산판에 취직해 막노동을 해야 했다.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겼지만그들이 던져주는 보리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에 감읍해야 했던 것은,자칭 백성을 위한다던 위정자들의 무능이 불러온 역사의 참화였다.
재약산 정상에서 바라 본 사자평 운해
아뿔싸, 남의 나라 땅을 차지한 왜인들은 이 땅을 너무도 몰랐다. 그 고단한 삶의 분노 탓인지, 아니면 하늘이 착취자들의 괘씸함에 벌을 내린 것인지 모르겠으나 영남알프스 일원에는 강설량이 충분치 않았다. 결국 그들은 온 산을 헤집어 놓기만 하고 이 땅에서 쫓겨 갔다.
상처를 가득 입은 땅에 하나 둘 억새가 자라나고, 고산의 습한 기운을 머금은 고사리가 올라왔다. 8부 능선에 정착지를 마련한 사람들은 고사리를 팔아 생계를 이었는데 한창 때는 주민의 80% 이상이 고사리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본격 고사리마을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독립된 조국도 그 고단한 민초들을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껴가게 두질 않았다. 잠시 간의 평화 뒤,주민들은 빨치산 토벌대의 청야 작전과 미군들의 폭격 때문에 또 다시 쫓겨나야 했다.
일제,빨치산,토벌대, 화전민들이 헤집고간 65만 평의 땅에 억새가 자라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제일 넓은 사자평 억새평원은 그렇게 재약산의 자연치유력으로 생겨난 것이다.
재약산 사자평은 어제의 피눈물이 오늘은 최고의 놀이터가 된 곳이다. 근래 들어 진달래, 산철쭉 등의 잔 나무들이 너무 많이 자라나서 전국 최대 억새밭의 명성은 자연스레 무색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억새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하지만, 실상 억새밭에 작은 관목들이 나타나는 작금의 현상은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어쩌면 우리세대가 이 별을 떠나기 전에 사자평에는 활엽수와 침엽수들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