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시탐구

경주 남산

남산에서 만난 도시의 기억

by 바람개비

<경주 남산, 마음 스케치>


근래 들어 제 기억 속의 장마는 대부분 "마른장마"였습니다. 오히려 장마전선이 물러가고 난 뒤에 태풍도 오고 비도 많이 내렸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번 장마전선은 그 시작부터 날짜를 잘 지켜 비를 내려주니 우산을 챙기고, 외출 일정을 잡는 일들이 훨씬 수월 해졌습니다.
계속 하늘이 우중충하면 힘이 빠질터인데 중간에 하루 이틀 씩 쉬는 시간을 주니, 잠시 하늘 보며 쉬어가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습니다.
지난주에도 연박으로 비가 와서 갑갑하던 차에 마침 주말에 산 길을 열어주네요. 다른 산들은 찐득해진 부엽토들이 필시 신발을 핫도그로 만들 것이고, 모래흙이라 물 빠짐이 좋은 경주 남산을 찾아 가봅니다.

이미 한 무리의 탐방객들이 삼불전에 모여 앉아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만, 이 중에 태반은 산 정상에 도착할 즈음에 지금 듣고 있는 설명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생존이 시급하던 예전에는 그저 돌덩어리 골동품에 불과했는데, 문화를 즐길 여유를 갖게 된 지금엔 돌부처의 발가락을 만든 조각기법까지도 문화해설사님들의 구수한 설명을 통해 아트의 경지로 거듭납니다.


경주 남산은 <사단법인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매주 토, 일, 공휴일에 무료로 문화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코스별로 약한 등산부터, 둘레길, 등산 등등이 있고,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신에게 맞는 시간과 코스 선택을 해서 예약을 하고 참가하시면 알찬 남산을 구경하고 올 수 있습니다.


이 곳 남산에도 구석구석 함께 했던 이들과 좋은 추억이 있는 장소들이 많이 있네요. 운 좋게 다친 이들도 없었고, 험한 코스로 골라가며 억지 산행은 하지 않아서 여기저기 즐거운 추억들이 담긴 장소들이 보입니다.
삼불사 코스의 '하마바위'는 오늘도 웃습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눈도 웃고, 그 큰 입은 귀까지 걸려 더 커져 있네요. 가만 보고 있자니 덩달아 웃음이 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가 살고 있는 도심에서는 즐겁지 않은 기억들이 많아졌습니다. 업무 때문에 싸우고, 없는 돈 때문에 싸우고, 기껏 종이 한 장에 불과한 계약서 때문에 싸운 기억들도 있습니다. 가족이 다치고 친구가 아팠던 병원도 있고, 지인들과의 마지막 이별식을 치른 장례식장들과 심지어는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스티커를 발부받았던 장소까지...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날카로운 흉기 같은 추억이 기다리고 있는 곳, 도시의 추억은 그런 것 같습니다.


실직을 해서 고용보험을 타러 가던 길도 늘 지나다니고 있고, 면접에서 떨어져 눈물 삼키며 돌아오던 길, 백일이 갓 지난 아이의 분유값이 없어서 진열된 분유 깡통을 쳐다보며 가슴을 싸잡던 가게도 도심에 있습니다. 싸가지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A사장과 종업원을 머슴같이 부려먹으며 가족타령을 해대던 B사장이 있는 곳... 제가 살아 온 도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산 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시내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을 추수를 위해 잘 다듬어진 논 밭이 있고, 평화롭게 뻗어 나가는 도로가 있습니다. 아둥바둥도 없고 멱살잡이도 없습니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무례한 고함을 질러대는 등산객들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10분이면 그들을 내 영역에서 떼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등산의 묘미이지요.

아들을 낳겠다고 간절히 빌었다던 산신당 바위와 남산을 통째로 기단석으로 사용했다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에는 이 땅에 먼저 살았던 이들의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하늘과 가까운 곳, 땅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은 하늘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빌어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과 다르지 않게 그들 대부분에게도 도시라는 곳은 발 딛고 선 현실 그 자체였을 테니까요.


오늘 이 곳을 오르는 이들의 고민과 간절함은 오백 년 전, 천 년 전의 그들과 다를까요. 글쎄요... 아니올시다라고 답하는 것이 정답일 듯합니다.

내가 등산을 하는 이유는 정상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상으로 걸어가기 위해서이다

지난 일요일, 정상에 서고자 걸었던 길이 아니라, 걸어가기 위해서 걸었던 경주 남산의 마음스케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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