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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개비 Jul 03. 2020

꽃을 든 남자

아! 그리운 나의 아버지시여

바삐 살아서인지 아니면, 몽상으로 하게 살아서인지, 외근이 잦은 편인데도 제철 꽃을 보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특히 영춘화나 벚꽃처럼 개화기간이 짧은 꽃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 보면 겨우 낙화나 보는 것에 만족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매년 봄이 되어 친구들이 "올해 벚꽃은 봤냐?"라고 물어오면 잠시 대답을 망설이게 됩니다. 벚꽃으로 유명한 진해를 업무상 자주 방문하는데, 오며 가며 거리에 도열한 가로수를 바라보지 않은 것은 아닐 터이니 매년 벚꽃을 분명히 보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해의 기억 속에서는 본 것인지 또 정작은 안 본 것이 맞는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도 출장길에 신호 대기를 하던 중에 문득 고개를 돌려 갓길을 보니 익숙한 노란 꽃이 피어 있습니다.

두 해 살이 꽃으로 여기저기 빈 터나 둑길 같은 곳에 주인인 듯, 객인 듯 들풀로 피어나는  달맞이꽃입니다.


종종 다니던 길이었는데 오늘에야 보게 되다니, 누가 보면 어지간히 바빠서 억만금이라도 버는 사람인 줄 오해하기 딱 좋습니다.


꽃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사람마다 추억이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 노란 달맞이 꽃은 남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멋도 없이 아무렇게나 키만 불쑥 크는 달맞이 꽃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이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입니다.

다소 험한 일을 하고 있는 저는 성격이 급하다 보니 업무를 볼  몸을 사리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살이 찢어져 꿰매기도 하고 뼈가 부러지는 일도 잦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아파 죽겠다고 엄살을 떨어대는 '담'이나 '인대 파열' 같은 경증의 부상은 너무 흔해서 아픈 축에도 못 들지요.


한 번은 왼쪽 골반부터 무릎 뒤까지 이어지는 근육부뻐근한 듯한 불쾌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 이면 끝날 거라 생각한 통증은 한 달이 가고,  달이 지나도 좀처럼 나을 기미가 없었습니다. 병원을 가자니 안 아프고, 안 가자니 아프고...

어느 날 아버지를 뵈러 고향 집에 갔더니 "아범은 다리를 다쳤냐.  왜 다리를 절고 다니냐?"라고 물으시더군요.

저도 모르게 불편한 근육을 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힘을 가하지 않다 보니 아버지의 눈에 그게 단박에 보이셨나 봅니다. 여차저차 이러저러, 대수롭지 않으니 걱정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그날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두어 주일쯤 지나서 아버지께서는 1.5L 페트병 2병에 한약 같은 것을 가득 채워 들고 저희 집을 오셨습니다. 시외버스를 타면 20분이면 오실 길인데 지하철이 무료라고 하시며 두 시간 넘어 환승하시는 것을 마다하시지 않고 오셨지요.

그러고는 "시골 이모에게 들었는데 달맞이 꽃대를  삶아 먹으면 너처럼 아픈 게 낫는단다" 하시며 내어 놓으십니다. 고향집 누나에게 들으니 저를 줘야 한다고 온 동네  둑길을 다니시며 달맞이 줄기를 잘라오셔서 집에 온통 풀내와 약내가 가득하다고 투정을 하십니다.

검은 봉지를 내려놓으신 아버지에게 왠지 부아가 슬그머니 올라왔습니다. 몇 날 며칠을 둑길을 다니시며 여기저기 풀독이 오르시고, 벌레에 쏘이시고, 이걸 말리고 직접 탕제를 하신 것도 모자라 멀쩡한 아들 놈 다리 아프다고 두 시간을 들고 돌아오셨으니... 저를 불러 가져가라 해도 될 것을 이리까지 하신 융통성 없으신 아버지가 답답해서인지, 나이 먹고 제 몸뚱이 하나 간수 못한 저 스스로한테 화가 났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아는 달맞이의 효능은 인후염, 비염 같은
기관지 계통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비릿한 풀내음과 정제되지 않은 흙내음까지 느껴지는 날 것 그대로의 달맞이 꽃대탕이었지만, 아버지의 정성이 고마워 며칠을 커피 대신 마셨습니다. 한데 보름쯤 지나자 거짓말처럼 그 통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버지께 기적과도 같이 그 효험을 본  말씀을 드렸더니 "병은 뿌리를  뽑아야 된다"시며 그만두시라 만류에도 아랑곳 않으시고, 그 뒤로도 서너 번을 더 장만을 해오셨습니다. 그 명약 때문인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통증조차 없습니다.


달맞이꽃은 달이 뜰 무렵 피었다가 해가 뜨면 시들어버립니다. 달바라기꽃이니 월견초(月見草)라고 부릅니다. 미물인 달맞이꽃은 시시 때때 맞춰 달을 보는데, 자칭 지구상의 영물이라는 저는 떠나가신 아버지를 뵙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진즉에 알아보고 아버지바라기를 했던

부견초(父見草) 이기라도 했다면, 이리도 미안하고 그립진 않았을 터이지요.


아버지, 아버지, 아! 그리운 나의 아버지시여.

달맞이꽃 뿌리만큼 강인했으나 꽃처럼 여리셨던 나의 아버지시여.

오늘 당신이 앓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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