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악계에 2018년 김창호 대장과 원정대의 급작스런 죽음에 이어 김홍빈 대장의 비보가 또 전해졌다. 27세에 10손가락을 잃었으면서도,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7 대륙 최고봉을 올랐고, 8000m급 고봉 14좌를 모두 오른 명실상부한 산악계의 걸출한 인물이다.
광주시산악회
우리는 이미 고상돈 대장을 시작으로 박영석, 김창호, 박무택 등등 이른바 메이커 산악인들을 많이 잃었다. 특히 히말라야 만년설에는 수 십 년이 지나도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냉동상태로 남아 있는 산악인들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히말라야의 매력은 무엇일까?
대학을 졸업할 무렵, 서울에 있는굴지의 산악 잡지사에 면접을 봤던 적이 있었다. 면접관이 "에베레스트 같은 고산 원정 중에 죽는 산악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그 면접관은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한국 산악계에서 내로라하는 정도의 이름을 가진 분이다.
질문에 앞서 자신의 친구가 원정 중에 죽었다고 했으니, 질문의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 그날 면접의 맥락으로 볼 때, 아마도 그 면접관은 "소신을 위해 죽은 멋진 영웅"이라는 답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물론, 가끔 산악인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 내 평소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면접관의 의도가 뻔한 답을 요구했기에 그렇게 뻔한 답을 하기 싫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신념 가득한 죽음이 이런 자리에서 싸구려 술안주처럼 회자되는 게 싫었다.
내가 누구의 죽음에 값을 매길 자격이 있을까
엉뚱한 줄 알면서 초점을 잃은 대답을 했다.
"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단 1%의 위험이 있다면 그걸 제거하고 도전하겠습니다."
면접관은 그게 아니라면서 집요하게 "영웅들의 죽음"에 관한 질문을 했고, 그들을 "영웅"이라고 인정하는 나를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그가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고, 보란 듯이 낙방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미 편집장의 산악회 후배라는 내정자가 있었고, 낙방자에게는 그나마 면접비를 주어서 돌아 올 차비는 건진 게 다행이었다. 나는 정기구독을 취소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2018년에는 김창호 원정팀의 비보가 전해졌다. 불과 한 해 전에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활짝 웃던 사람이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내 카메라에 직찍으로 담겨 있는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그리고, 김홍빈 대장. 그들은 이제 나에게는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인물이 되었다. 나는 그들을 잘 모른다. 그들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도 모르고, 그들에게 베여 있는 산의 냄새도 모른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세상을 잘 모르겠다.
나는 매주 1~2회의 산행을 한다. 뒷산 전문 산악인인 셈이다. 가끔은 험한 바위를 기어오르거나 지도에 없는 숲을 헤쳐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늘 목표는 단 하나다.
그저 나는 스릴 가득한 산행을 즐거이마무리하고, 집으로 와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싶다.산악사고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고,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못할 짓인 것 같고, 자기완성의 꿈을 좇다가 별이 되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값진 죽음이라 생각된다.
오늘 또 한 번 그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그때 면접관을 애달프게 했던 내 까칠한대답을 떠올려본다.
" 남은 가족들의 시선에서 답해야 하나요?아니면, 죽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하나요?어떤 기준이든 제가 그 사람들의 죽음을 평가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었고,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들이었으니까요!
제가 아는 히말라야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오직 신념이 머무는 곳입니다."
삼가 김홍빈 대장의 명복을 빌며, 김대장의 신념은 영원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음을 천명한다.
광주시산악회
"산을 바라볼 때 가장 행복하다"던 김대장에게 작별한다.
나마스카
*나마스테의 존칭 형태로, "나는 당신의 과거는 모르지만 지금 현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