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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대로 쩡 May 29. 2018

아빠의 작은 발을 만지며...

- 젊은 시절의 아빠(엄마, 외삼촌)와 아프고 나서의 아빠(작은언니, 나)

아빠...

내가 다닌 초등학교 뒤편에 아빠가 계신다. 아빠는 벌써 20년째 그곳에 터를 잡고 있다. 오랜만에 시골집에 갔다가 아빠를 만나고 왔다. 평소와 달리 아빠를 보고 가슴 뭉클한 기분이 들더니 다음날 꿈을 꿨다. 나는 아직도 아빠 꿈을 자주 꾼다. 여전히 마르고 아팠던 모습 그대로 때로는 화려한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때로는 양복 입는 모습으로, 때로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빠!!!

젊은 시절 아빠는 꽤 똑똑하고 멋진 모습이었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프지 않던 아빠의 단상은 몇 되지 않지만 오빠 언니, 친척들의 말은 그랬다. 사진으로 본 젊은 시절 아빠 모습은 내가 봐도 참 멋지다.

 

투병 중이었을 때도 얼마간은 숙제 때문에 물어보면 뭐든 척척 알려주곤 했다. 역사, 세계사도 잘 알았고 한문은 기본, 일본어와 영어에도 능통했던 아빠. 글씨를 잘 써서 새 학기면 늘 아빠한테 반과 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학교에 가면 나처럼 멋진 글씨로 이름을 써오는 애가 없어 너무 뿌듯했던 아빠 글씨. 그런 아빠가 아프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창 시절 내내 생각했다.


특히 노래를 너무너무 잘해서 매력적이었던 아빠. 지금도 나는 아빠가 술 취해 부르던 두곡의 노래는 한 소절도 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다. 그런 아빠의 노래 실력은 오빠만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노래 부르는 오빠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만 엄마의 유전자도 물려받은 오빠는 반박자 박치 실력인 것이 조금 안 쉽긴 하다. (^^)

 

아빠는 막내딸인 나를 엄청 사랑해주셨다. 물론 첫째였던 오빠와 뽀얗고 환하게 잘~생긴 큰언니를 사랑했던 일화 역시 많지만 ‘막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나에 대한 아빠의 사랑은 남달랐다 자부(?)한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기였던 시절에는 늘 나를 엎고 다녔다는 언니들의 증언이 있었고, 좀 커서는 아빠 친구 모임에도 나를 데리고 다닌 기억이 난다. 어려서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곤 했지만 나를 데리고 다녀 준 덕분에 지금 이렇게 추억할 수 있어서 그 시간이 너무 감사하다. 마작을 즐겼던 아빠 친구들 모임은 시내 중간에 있던 남산 정자였다. 아빠가 사준다던 분홍색 꽃 구두를 기대하며 정자 옆 잔디밭을 뛰어놀던 기억이 난다. 결국 꽃 구두는 눈물로 하루를 마감해야 했던 약속이 되고 말았지만 다음에 또 속아 넘어가게 되는 아이템일만큼 어린 여자아이에게는 강력한 것이었다.


아빠 친구들은 나를 보며 “손녀는 왜 또 데리고 왔냐” 놀리셨다. 지금은 결혼할 나이로도 이해되지만 그 당시 아빠 나이 마흔이 넘어 나를 낳았으니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빠는 이미 성인이었고 (나와 15살 차이) 나는 막둥이 었으니 아빠에게 손녀가 있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소리가 서러워 울음으로 시작했던 아빠 친구들 모임. 10원, 50원, 용돈을 받고서야 눈물을 멈췄던 기억이 난다.


아빠를 따라나서지 않던 날엔 밤이 늦도록 아빠를 기다렸다. '따라갈걸 그랬나?'하며 마루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아빠 노랫소리를 기다린다. 분명 오늘도 친구들이랑 한잔하고 기분 좋아져 휘청거리며 목청껏 부를 노랫소리.(엄마는 엄청 싫어하셨지만...) 역시나 저 멀리서 아빠 노랫소리가 들리면 뛰어나가 마중한다. 가끔씩 아빠 손에 들려 함께 귀가한 노란 봉투 속 크림빵이 목적이었지만 어린아이는 원래 그런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술 취한 날이면 언제나 나를 꼭 안고 주무셨다. 싫다고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었다. 하루 종일 옆에 데리고 다녀야 했을 막내딸을 아빠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까칠한 아빠 수염이 싫고 술냄새가 싫었지만 그런 날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아빠와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아빠가 다쳐 집에 왔을 때 나던 피비린내 역시 아빠를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 단상 중 하나다.

“아빠 죽으면 안 돼. 나 '딴딴 딴 따~' 해줘야지.”

다친 아빠 옆에서 울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도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시골로 찾아다니는 방송에서 뽀빠이 아저씨가 떠난 남편 생각하면 뭐가 기억나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날 일을 말씀하셨다. 쪼그만한게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며.


그 후 한참을 막내 언니와 둘이서 지내야 했다. 아빠는 큰 수술이 필요했고 엄마는 병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침내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앙상한 모습으로, 앞 머리에 움푹 파인 상처를 안은 체였다. 아빠를 본 순간, “아빠! 나 누군지 알아?”하고 물어봤을 만큼 아파 보였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데리고 친구를 만나러 갈 일도, 노란 봉투 속 크림빵을 사들고 올 수도 없어진 아빠.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버스 타고 큰집으로 명절 쇠러 가는 아빠를 '지키기 위해' 따라나서야 했다. 10년을 넘게 아팠고 2년을 누워만 계시다 대학생이 된 내가 편의점에서 새벽 알바를 하던 어느 날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방에 누워 움직이지 않던 아빠를 볼 때 아빠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생각했다. 똑똑하고 멋지게 태어나 초라한 모습으로 떠나는 아빠. 다음 생이 있다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불태우며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멋지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아빠 발을 만지며 작별인사를 하던 그 밤. 아빠가 누워있던 방을 나갈 수 없어 아빠 발을 만지고 또 만졌다. 원래도 작아 어른 같지 않던, 뼈만 남은 앙상한 발을.


아파서 이런저런 생각이 뒤엉킨 아빠는 몸도 마음도 자주 가출(?)했다. 엄마는 장마철이면 집안 농사를 잠시 접고 동네 아줌마들과 다른 데로 일을 가셨다.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아 가끔 집에 오셨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와 둘이 있었다. (언니 오빠들은 이미 집을 떠나 서울에 살 때다.) 저녁이 되면 나갔던 아빠도 집으로 들어오는데 그날은 왠지 안 들어온다. 낮에 오던 보슬비는 장대비로 바뀌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캄캄한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찾아 동네를 헤매다 엉엉 울며 작은 아빠를 찾아갔다. 작은 아빠, 사촌오빠, 나 셋이서 다시 한번 온 동네를 뒤졌다. 결국 작은 아빠는 시내로 가보겠다며 택시를 불러 타고 나갔다. 남은 사촌오빠와 나는 비를 맞으며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한참이 지나 택시가 돌아왔다. 아빠를 찾아온 작은 아빠. 역시 형제의 촉은 남달랐다. 큰아빠에게 따질 게 있다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작은 아빠는 예상했던 곳에서 아빠를 찾았다. 억수같이 내리던 장대비를 그대로 맞으며 몇 시간째 형 집을 향해 걷고 있던 작은 아빠의 작은형을, 나의 아빠를.

그날 이후 아빠를 기다리다 저녁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큰아빠네 집 방향으로 얼마 못 가고 앉아있는 아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 다리는 그날의 가출로 오래 걷기에 무리인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멀리 가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돌아오거나 힘들 때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날, 나는 아빠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에 떨었었다. 다쳐서 집에 왔을 때  '딴딴 딴 따~' 못해주면 어쩌나 걱정하던 날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감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그날 밤 나는, 비 오던 여름날 생각이 많이 났다. 아빠를 잃어버릴 뻔했던 그날의 아찔함을 떠올리며 안도의 마음으로 아빠를 보냈다.

비 오던 그날 아빠를 찾아서 다행이다... 그날 아빠를 잃어버렸으면 평생 아빠에게 미안했을 텐데... 이렇게 긴 시간 같이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나는,

아빠의 작은 발을 만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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