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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대로 쩡 Nov 23. 2018

‘행복 단어장’ 모으기

아이는 ‘행복 단어장’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슬픈 일이 있을 때, 심술이 날 때 ‘행복 단어장’을 꺼내 보면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어수룩해지는 저녁, 마을 초입에서 술 취한 아빠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으악새 슬피우~~우는 가으을이~~~인가아아아요~”

아이는 신발을 꺾어 신은 채 뛰쳐나갔다. 저녁이면 까칠해지는 아빠의 턱수염과 술 냄새는 싫지만 뽀뽀와 손에 든 까만 봉지는 좋아했던 아이. 아이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마음을 울리는 듯한 아빠의 노래가 좋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까만 봉지를 열고 크림빵을 꺼내 먹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봉당에 닿지 않는 다리를 흔들며 아빠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빠의 노래와 노란 크림빵을 ‘행복 단어장’으로 넣었다.


유난히 뜨거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날, 아이는 엄마 무릎을 베고 마루에 누웠다. 한가한 날 없이 바빴던 엄마는 일하러 가는 것을 미루고 아이의 배를 쓰다듬으며 노래를 불렀다.

“강아지 배는 똥배~ 엄마 손은 약손~ 강아지 배는 똥배~ 엄마 손은 약손~”

엄마는 아이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등으로 햇살을 막아섰다. 아이는 배앓이의 통증과 엄마의 손, 가을 햇살을 ‘행복 단어장에 넣었다.


아이는 친구들과 산딸기를 따러갔다. 엄마가 건네준 양은 주전자를 팔에 끼고 앞산으로 올라갔다. 풀숲을 해치고 가시밭을 지나다 뱀을 만났다. 시골에서는 흔하게 만나는 뱀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는 막대로 휘휘 저어 쫓아냈다. 딸기 따기를 두 시간. 주전자는 금세 딸기로 가득했다.


산을 내려오는 길, 오디나무를 발견하고 손가락이 새까맣게 물드는 것도 모른 채 오디를 주전자에 따 넣었다.


무거워진 주전자를 오른손으로 한번, 왼손으로 한번 옮겨가며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발그레한 볼 속에서 뿌듯함이 묻어 나왔다. 가족 모두에게 딸기와 오디를 보여줬다. 뱀을 쫒아 보낸 것을 시작으로 딸기는 어디서 땄으며 오디나무를 발견한 일까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이는 엄마가 담가 둔 과일주를 보며 딸기와 오디를 ‘행복 단어장’에 넣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선생님에게 어른의 ‘행복 단어장’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어른들은 사느라 바빠서 그런 일을 할 수 없어. ‘행복 단어장’을 찾을 일도 많지 않거든. 너처럼 어린아이들만 열심히 모은 단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행복 단어장’ 모으는 일을 하지 않는 어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영원히 아이로 살면서 ‘행복 단어장’을 실컷 모을래요!”

선생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수업시간에 어린이는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은 성인이 되어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아이는 그 사실을 인생 최고의 고통으로 느꼈다. 자신이 ‘행복 단어장’을 모을 수 없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영원히 어린이로 살면 행복 단어장을 모을 수 있잖아!!!소리 내어 다짐하며 어린이를 ‘행복 단어장’으로 넣었다.


아이는 몸이 자라면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 가더라도 절대 어른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어른의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남을 헐뜯고,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원하는 것만 취하고 돌아서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노고를 자신의 성과인 양 낚아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빠의 노래와 크림빵처럼, 햇살 속 엄마의 손처럼, 앞산의 딸기와 오디처럼 ‘행복 단어장’으로 넣어 둘 일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절망했다. 하지만 아이는 끊임없이 ‘행복 단어장’에 보관할 일을 찾아 헤맸다.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애를 써도 '행복 단어장'에 넣을 일을 찾을 수 없던 아이는 점점 지쳐갔다.

어린이로 살겠다는 다짐도, ‘행복 단어장’을 모으는 취미도 잊어가기 시작할 무렵, ‘행복 단어장’을 한 아름 안고 있는 남자아이를 만났다.

“어떻게 어른 세상에서 ‘행복 단어장’을 이렇게 많이 모았어?  나는 어른 세상에는 ‘행복 단어장’에 넣어 둘 일을 찾을 수가 없었어!!!”
 “아니야! 어른 세상에서도 ‘행복 단어장’으로 넣어 둘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도 가르쳐줄까?”
 “응!!!”

둘은 친구가 되었다. 남자아이는 이른 아침의 햇살도, 함께 먹는 음식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행복 단어장’으로 보관할 수 있다고 가르쳐줬다. 아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행복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며 일상에서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아이의 ‘행복 단어장’은 다시 쌓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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