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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대로 쩡 Nov 30. 2018

이별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또다시 마지막이다. 십여 년이 넘도록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짐을 싸고 푸는 일에 익숙하다. 길게는 1년, 짧게는 몇 달. 이번처럼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기간에 짐을 풀었다 싼 적은 없지만 시간과 상관없이 마지막 날은 언제나 지난 시간이 무정하게 느껴진다.


기분 좋게 머리칼을 넘겨주던 얇은 바람이 머리칼을 덮고 싶을 만큼 차갑고 두터운 바람으로 바뀐 두 달이 지났다.


일주일 전부터 짐을 정리했다. 서랍을, 받침대를, 필통을... 그렇게 떠날 준비를 하는 마음은 늘 반반이다. 지겨워 뒤돌아보기 싫다가도 사람들과의 이별이 헛헛하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을 떠나고 싶다가도 떠나면 그리워질 공간과의 이별이 헛헛하다.


대단한 인연은 아니다. 헤어지면 보지 않을 인연. 어디서 마주치면 과거를 한참이나 뒤적여야 생각이 날듯 말듯한 인연. 작은 옷깃이나마 스친 인연이기에 이 헤어짐도 잔잔하게나마 마음속 물결을 일으킨다.


남편은 이런 나를 부러워한다. 매일 아침 D-Day를 확인시켜준다.


"이제 5일 남았어요!!!"

"내일이면 끝나요!!!"


대리만족하고 있는것이겠지?


정해진 날짜에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것이 프리랜서다. '더럽고 치사하다! 멋지게 사표를 내던지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상상을 하는 직장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 가장 길게 다녔던 정규직은 만 4년이다. 일곱 번의 면접을 거쳐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나를 보여주기 위해 발밑에 묻어두었던 에너지까지 꺼내 일을 했다. 마지막 1년은 더욱 그랬다.


모바일 커머스 시장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회사에서 모바일로 물건을 팔아보자 호기롭게 시작했다. 하지만 시장의 미지근한 반응에 팀은 해체되었다.


그 후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게 내 임무였다. 실패한 팀의 팀원이라는 꼬리표를 벗어던지기 위해 신규 서비스 성공은 필수였다. '너 한번 해보자' 식으로 일에 매달렸다. 서울시내를 돌며, 지방에 본사를 둔 프랜차이즈 업체를 다니며 해내지 못하면 무능력자 그룹으로 분류되기라도 하는 듯 매달렸다.


대기업 타이틀을 쥐고도 나는 을이었고 세상에 처음 내놓을 서비스에 대한 설명을 하고 또 해야 했다. 모두가 갸우뚱하며 고개를 내 저을 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냈다. 나조차 생소했던 서비스를 설명하느라 목이 쉬고, 무더운 여름 미팅을 다니느라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6개월을 제휴에 매달려 대형 프랜차이즈들과의 계약을 성공시켰다. 20대 마지막을 함께한 고통의 산물이었다. 한 달만에 십억 대의 매출을 올리며 성공적인 론칭을 했다.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그 해 연말 인사 고과를 앞두고 모두들 나에게 크게 한턱 쏘라고 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인사고과를 받고, 인센티브를 받고 퇴사 결심을 했다. 혼자 물질을 해대던 내 배에 함께 타 경치를 즐기던 '남자'의 미소가 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 후 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처음 프리랜서가 되었을 때 바람이 흔들면 떨어져야 하는 낙엽 같은 존재가 된 것이 못내 서글펐다. 낙엽인지 모르고 정을 주며 관계를 맺던 사람들과의 이별이 슬펐다. 나무에 붙어 있고 싶던 시절이 지나고 짐을 풀고 싸는 것에 익숙해진 지금에도 여전히 헤어짐은 스산하다.  


마지막 날은 생각이 많아진다. 인사고과를 받을 일도, 인센티브를 받을 일도, 그것으로 '퇴사'를 결심할 일도 없는 프리랜서 세계지만 매번 이별에 대한 아쉬움을 결심으로 이겨내야 한다.


익숙해진 사람들, 익숙해진 공간과의 이별, 미래에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뒤섞여 알 수 없는 4차원적인 감정들이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감정들을 추스르는데 늘 그렇듯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별은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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