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불행> 페터 한트케
제목에서 왠지 모를 무거운 감성이 느껴졌다. <소망 없는 불행>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이름을 올린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와 딸 이야기다. <관객모독> <카스파>는 알았으나 페터 한트케의 다른 작품은 처음이다. 이 책은 두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토요일 밤 A면(G읍)의 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 - p 9
이야기의 시작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한 어머니의 기사다. 그의 필체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냉소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글이 마른 낙엽처럼 갈라지듯 밟혔다.
1920년에 여자로 태어난 어머니는 가진 능력과 욕망이 컸음에도 시대를 잘못 만나 꽃 피우지 못한 삶을 살았다. 여자아이 교육에 돈을 쓸 수 없다는 냉정한 아버지의 결정에 의무교육 외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16살에 집을 나와 호텔에서 궂은일을 하며 요리를 배웠다. 도시로 나와 살면서 활력을 얻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유부남이었다. 유부남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아가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기에 새로운 남편을 찾아 재혼한다. 두 번째 만난 남자는 능력 없고 폭력적이었지만 결혼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자신이 없어 맞으며 참고, 아이를 지우며 참고, 찢어진 가난을 참으며 살아냈다. 그녀에게는 한없이 고단한 가족을 이끌고 다시 고향에 내려가 여느 여자들처럼 살아가나 싶었지만 문학과 정치를 만나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하지만 생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직은 젊은 50에 알 수 없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 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든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중략) 그 마을의 여자 아이들이 많이들 하고 노는 말잇기 놀이도 <피곤하고 / 기진하고 / 병들고 / 죽어가고 / 죽고>라는 식으로 여자의 삶을 나타냈다. - p 17
어머니의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정해진 굴레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집을 뛰쳐나가 스스로 돈을 벌고, 남자를 선택하고 혼자 아들을 낳았다. 정해진 여자의 삶에서 벗어나는 듯했지만 새로운 남편을 만나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의 테두리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욕망은 내면에 감춰져 있을 뿐 분출하지 못하면 터져버리는 것, 그 시대의 다른 여자와 달리 문학을 이해하고 정치를 알았다.
그녀는 점차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여자>가 되어갔다. - p 61
어머니는 끝까지 정해진 굴레를 벗어난 삶을 살았다. 보통의 여자들이 주저앉아 시대를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시대를 뚫고 나가 스스로 다른 삶을 선택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온 알 수 없는 고통은 그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 의지로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 -p 65
어머니의 자살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사는 소망 없는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선택이 아니었을까. 의식 속에 있는 진공과 같은 공포를, 공포로 인해 닥치는 오늘의 불행을 겪으며 살 수 없다는 <그 여자>의 선택 말이다.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을 키우며 겪은 이야기를 풀어낸 글이다. 남자의 삶에 딸이 들어온 것인지, 딸의 삶에 남자가 들어간 것인지 혼돈의 시간을 맞이한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버림받은 인생이 될 뻔했음을, 자신에게 영감을 준 것도 아이 었음을 알게 되면서 그는 성장했다.
아이는 그에게 일거리로, 마치 현실적인 세상 일을 피하고자 하는 핑곗거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p 100
폐허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가족은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기다렸던 남자는 아이와의 삶이 생각처럼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인과의 관계도 <그 남자> <그 여자>였을 뿐이라는 단호한 표현을 할 만큼 순탄하지 못했으며 결국은 남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 가족이란 행복하고 포근하고 아름답고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가족이 그랬고 아내와의 가족이 그랬다.
아내와 아이를 둘 다 가족으로 여기며 지냈다.(사실 그에게 가족이란 <끔찍한 것>이었다.) -p 103
하지만 그에게 아이란 새로운 존재였다. 어딘가에 소속된 적 없는 남자가 아이를 통해 처음으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고 행복을 알아간다. 또한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알게 된다.
그때 그는 날마다 벌어지는 일에 영감을 주었던 것이 바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없다면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이다. 그의 일이란 것도 그에게 맞지 않고 무가치하게 보인다. - p 143
시종일관 냉소적이고 냉담해 보이는 그의 글이 시작과 달리 끝으로 향하며 변화한다.
위도에 비추어보아 전에 없이 온화하고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어느 일요일에 아이는 집 앞 모래 깔린 마당에 서 있다. (중략) 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칼과 조화를 이루며 펼쳐진다. (중략) 그런 순간들을 그들이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뭔가를 더 요구했다. 그건 선율, 바로 노래이다. - p 178
아이를 만나 혼돈스러웠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버거웠다.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던 홍수 나던 날, 울고 소리치는 아이의 뺨을 있는 힘껏 내려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하지만 독일인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당하는 아이를 위해 학교를 찾아 부당함을 호소한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거처를 옮겨 다닌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아이의 성장과 함께 자라난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남자는 아이의 모든 이야기에 부합될 시인의 문장 <칸틸레네-사랑과 모든 열정적인 행복이 충만하길>이라며 아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머니의 이야기와 달리 긍정적인 단어들이 등장했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아이 이야기>는 읽지 않고 책을 내려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유명 작가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건조한 글을 읽어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베케트(그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후 가장 전위적인 작가라는 그의 필체가 서정적이라는 정의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슬픔의 미학. 너무 슬퍼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일까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장과 아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문장이 아니었다면 더욱 힘겨웠을 책이다.
어머니의 소망 없는 불행 속에서 아이를 만나 소망의 불씨를 만난 그의 마음은 휘몰아치듯 변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물들듯 변화해간다. 가족은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삶은 불행했다. 그런 어머니와 가족을 이뤘던 자신의 삶도 그러했다. 아이는 그런 불행 속에서도 소망을 꽃피워준 존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준 존재였다. 삶은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오, 존재의 이유는 생을 다하기까지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것을 만나게 된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건조한 글 속에서도 잔잔한 물결이 그의 생을 푸른빛의 바다로 이끄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생명은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위대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페터 한트케의 작품 세계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다면 당분간은 더 빠지고 싶지 않을 만큼 짙은 회색이었다. 그의 삶이 어머니로 인해 어두워졌다면 아이로 인해 색깔이 담겨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덤덤히 이 책을 다시 읽어낼 날이 온다면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소설이 아닌 작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써 내려간 듯 무덤덤한 그의 필체에는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