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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Feb 07. 2022

카르페디엠(Carpe diem)!

  최근 우리 부부는 부고를 자주 접한다. 백세 시대라지만 부모님들의 연세가 80에 가까운 분들이 많다 보니 아프신 분들이 많다. 그래서 안부 전화를 하면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부모님의 안녕을 물어본다.   

   

  나는 4년 전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렀다. 시어머니는 매우 의지가 강하신 분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의식을 차린 후에 오른쪽 팔에 마비가 왔는데 이를 물리치료와 성경 필사로 거의 정상으로 회복하셨다. 2번째는 때마침 방문한 시누이 덕에 골드 타임에 치료를 받아 신체의 큰 이상 없이 극복하셨다. 시어머니는 행여나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노심초사하며 새벽 기도를 하시면서 총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성경 공부를 부지런히 하셨다. 하지만 3번째 쓰러지고 의식을 차리셨을 때는 “아프다. 너무 아프다” 란 말을 반복하셨다.

 우리는 쓰러지셨다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를 뵈러 달려갔다. 생명 연장을 위해, 아니 만나야 할 사람들을 위해 최신 장비가 시어머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머니 막내아들 왔어요”       

 하루 종일 눈을 감고 계셨다는데 ‘막내아들’이란 말에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시어머니의 얼굴에 바짝 얼굴을 대고 비비는 남편의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막내며느리.

지역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사투리마저도 달랐지만 어머니는 넉넉한 어른의 모습으로 대해 주셨고 가실 때까지 아름다운 ‘생’을 보여주셨다.      


 남편은 고향 절친 어머님의 부고를 듣고 다녀오마 했다. 밤새고 올 것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 했다. 오랜 병마로 의식을 잃은 채 몇 달간 병원에 계신 어머님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예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밤새고 온 남편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고인과의 추억을 상기하고 명복을 빌며 부모님을 보낸 가족들을 충분히 위로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 발걸음과 마음이 가벼웠으리라.     

 

 그러나 며칠 전 갑작스러운 부고는 우리 부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후배 부인의 소식이었다. 40대 초반의, 죽음을 맞이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었다. 부고를 듣고 남편은 내게 장례식장에 함께 가주겠냐고 요청을 했다. 마음이 아파 혼자서 못 갈 것 같다고 말이다. 정장을 차려입고 장례식장에 갔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조문객들 상당수가 오열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 두 아들이 맛난 음료수를 먹기 위해 냉장고 앞에 서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더 가슴을 부여잡았다.

“누가 그렇게 열심히 하라고 했냐. 왜 그렇게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기를 쓰고 살았냐 "

눈이 퉁퉁 부은 가족들은 바닥을 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1시간가량을 그냥 앉아만 있었다. 그저 우는 가족들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어 줄 뿐. 정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들의 죽음에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언론에서 말하는 평균 수명과 비슷한 연령대라 죽음이라는 필연성을 묵묵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추억하면서 나의 노후에 대해 생각해보며 미래를 설계하기도 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할까.’, ‘아프면 요양원을 가야겠지?’,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준비할까?’ 등 현실적인 생각에서부터, 생애 마지막 어떤 모습으로 평가받고 싶은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보낼지에 대해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은 충격과 슬픔을 준다. 제자나 후배 부인처럼 평균 수명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생의 마감을 보면 더 억울하고 황망한 생각이 든다.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공간인 집에서 누구도 예상 못한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죽음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더 두렵다.

 전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마주할 땐 생에 대해, 그리고 현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음을 위해 미뤄두고, 아껴두고, 참는 것은 없는지, 더 잘 살려고 애를 쓰고, 기를 쓰는 삶이 현재를 버리고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장을 보고 봄나물들을 사 와 음식을 한다.

입춘이 막 지난 오늘. 현재를 가득 머금은 나물을 삶고 무치고 접시에 담는다. 잡곡을 넣어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정성껏 그릇에 담아 아이들을 부른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음미하며 아이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인다. 아빠보다 훌쩍 커버린 둘째의 썰렁 개그에 크게 웃으며 입시의 고배를 마신 딸의 슬픔을 온몸으로 함께 하며 걱정을 한다.

 오늘에 충실하여 생을 즐길 수 있는 삶.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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