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는 모두의 예상대로 서울의 유명 대학에 무난히 입학했다. 그때부터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정호를 대하는 눈빛과 대우가 180도 달라졌다. 정호는 금융권에 취업을 원했기에 경영학부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모의 투자 대회에 나가 실력을 뽐냈고, 투자동아리 회원으로 재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호는 집에서 통학을 하며 그간 맛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과 호사를 누렸다. 지방 대학으로 진학한 정훈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떨어져 지냈으므로 정호는 눈꼴사나운 동생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룸메이트의 눈치를 보게 되는 기숙사 대신, 집에서 다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자취를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호는 대학에서도 조용한 학생이었다. 대학에서 강의는 따분했고 동기들은 낭만을 이야기하다가도 취업에 대한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혼란스러워했다.
“정호야! 너는 소심한 것 같은데 동아리는 왜 이렇게 많이 가입했어? 커피 동아리, 테니스 동아리, 영어 동아리, 사진 동아리 다 할 수 있겠어? 거기다 너 교양 수업도 다채롭던데.. 예대 수업까지!”
“그러게! 꿍꿍이 속이 있는 것 같은데... 여자아이들 많은 데잖아?”
“야~ 20대 피 끓는 청춘의 권리지! 크크크”
정호는 놀림에 그냥 미소로만 넘길 정도가 되었다. 대학생이었으나 정호는 고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늦은 밤까지 자기 방에서 컴퓨터로 무언가를 했다. 새벽까지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엄마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너는 밤새워 새벽까지 뭐 하냐?”
“미국증시 살펴보고 투자 동향 분석해요! 관심 끄세요. ”
정호의 엄마는 어렴풋이 외국의 증시는 우리나라와 시차가 달라서 새벽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으므로 아들의 노력이 기특했다.
정호가 본격적으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들어서게 된 계기는 대학 진학 후 동문회에서 시작되었다. 거의 울상을 한 주미가 동문회에서 도움을 호소한 것이다.
“아무래도 나 스토킹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며칠 전에 텔레그램을 설치했는데 나한테 끊임없이 이상한 문자와 음란물 사진이 오는 거야. 내 얼굴이 합성된 사진인데 정말 구역질 나는 사진들이 나에게 오고, 또는 나하고 데이트 하자며 시달리고 있어. 요즘 살고 싶지 않다니까? 경찰에 신고했는데 이런 사건은 조사해 봐야 피의자 특정 불가? 잡기 힘들 거라는 말만 계속 되돌아와! 고등학생 때 사진부터 현재까지 인스타며 카톡 프로필이며 다 이용한 거 보면 나 아는 사람들이라는 건데 너희들 중에 있는 거 아니야? 어?”
주미의 말에 정호는 움찔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주미가 희영이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을 구렁텅이로 끄집어 내려했을 때 참고 버틸 수 있었던 아주 소소한 복수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면서 제대로 한방 먹일 수 있는. 정호의 딥페이크로 음란물 만드는 기술은 날로 발전했고 익명의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며 번창하고 있었다. 희영이나 주미나 상대를 우습게 여기는 여자들이었으므로 복수를 당해도 싼 당사자니 정호는 죄책감 보다 응징의 마음이 컸다. 그의 은밀한 취미 생활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정호는 주미의 말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 혹시 원한 살 만한 사람은 없어? 잘 떠올려봐. ”
정호는 애써 침착하며 주미에게 말을 건넸다.
주미는 의미심장하게 정호를 바라보았다.
“너구나! 희영이 이야기 말했다고 원한을 가질 수 있잖아!”
정호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하하! 정호야! 역시 넌 내 놀림감이야. 너 같은 소심쟁이 새끼가 할 수도 없는 일이지!”
만취한 주미는 절친인 정호를 한껏 놀리며 슬퍼하다 온갖 추태를 부렸다.
정호는 주미에 대한 음란물 제작을 멈추고 다른 대상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집요하게 한 명이 아니라 가볍게 여러 명으로 작품을 돌려가며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호는 학교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다양한 먹잇감이 있으니.
취미 생활로 번 돈으로 주식과 코인에 투자하여 운용하면서 일반 직장인보다 수익이 나았으므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학교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동안 정훈은 착실하게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본가로 왔다. 정호가 다니는 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조교까지 꿰차니 부모님은 두 아들을 다시 품에서 키우는 기분이라며 행복해했다. 정호는 자취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혼자 살기가 귀찮았다.
정호는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배포할 때마다 느끼는 쾌감에 젖어있었다.
유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한 후 정훈은 정중히 거절을 하며 사과를 했다. 도저히 자신이 없다며 유교수를 볼 면목이 없다는 말을 교수연구실까지 찾아와 전했다. 유교수는 정훈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자신의 소중한 가발 하나를 잠시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유교수가 9월부터 교환교수로 미국에 갈 예정인데 돌아올 때까지만 보관을 부탁한 것이다.
“유리관에 넣어 줄 테니 그냥 가지고만 있어 주게. 그것만 해 줄 수 있겠나?”
정훈은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유교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방 뒷베란다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가족들이 보지 못하게 흰 천을 덮어 놓고 숨겨놓았다.
“쿵”
“쿵”
정호는 아무도 없는 시간에 어디선가 자꾸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똑 똑”
“똑 똑”
누군가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호는 짜증을 내며 문을 벌컥 열었다. 정호의 방문 앞에는 윤기가 흐르는 가발이 놓여 있었다. 분명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사람은 없고 가발이 놓여 있다니...
컴퓨터를 너무 많이 해서 환각 증세가 생긴 것 같아 정호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가발을 보니 자신의 원형 탈모를 걱정해 엄마가 가져다 두었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발만 덜렁 아무렇게 두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광채가 나는 가발을 한 번 써보기라도 할까 마음이 들었다. 정호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이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 자기 얼굴을 대면하며 가발을 써 보았다. 가발을 쓰자 정호는 자신의 외모가 확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거울에서 본 사람과 전혀 딴판이 된 자신을 보고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