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없이 친구들을 만날 때쯤 알게 되었다. 내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목에서만 머물고, 그 간질간질함과 답답함을 견뎌야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을 너무나 어린 나이에 깨달아야 했다. 왜 하필 나는 말을 더듬었을까? 인터넷을 찾아보면 신경학적 원인, 심리적 원인, 유전적 원인이 있다는데 어떤 압박감을 느껴 그렇게 된 기억이 없고 유전도 아니다. 그냥 타고나길 뇌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말수가 적은 어린이가 됐다. 말을 하려다 말을 더듬어서 부끄러운 것이 더 싫으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대신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쪽지에 적어 수줍게 건네곤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다니던 피아노 학원의 원장 선생님 딸은 무척이나 다정한 아이여서 말을 먼저 건네지 못하고 겉도는 나를 땅따먹기 놀이에 꼭 껴주었다. 지극히도 평범한 내 이름인 '민지'에 비해 무척이나 예쁜 이름이었던 '소원'이. 아직도 이름과 그 아이의 웃음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피아노에 바이올린까지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잘해서 늘 당당한 모습이었던 것조차. 나는 그 아이를 동경했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내가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학교 뒷동산에 있는, 아주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엄마에게는 늘 좋은 향기가 났다. 그리고 엄마는 말을 더듬어서 소극적인 나를 위해, 나를 늘 향기로운 아이로 만들려고 애썼다. 늘 좋은 옷을 입었고 예쁜 모자를 썼다. 조금이라도 음식이 묻은 옷은 바로 손빨래를 해서라도 깨끗한 옷만 입혔다.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등교 때나 하교 때나 늘 내 옆에 있었고,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긴장한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엄마와 아빠가 헤어졌다. 경제력이 있던 아빠가 나와 동생을 양육하게 되었고 우리는 인천의 오래된 주택에 살고 있는 할머니댁에 들어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보통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하면 '우리 강아지'하면서 아낌없이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할머니와 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의 장녀였고 무뚝뚝한 충청도 여자였다.
뒤를 돌아보면 늘 서있던 엄마가 없다. 나는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말더듬이는 생존하기 위해 많은 친구들을 만들기로 했다.
친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는 '말더듬이' 놀림은 늘 있었지만, 생각보다 따뜻하고 배려심 있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때때로 내가 없는 자리에서 '미, 민지는 어, 어디래?'라며 흉 보는 아이도 있었지만 능청스럽게 모른 척을 하고 그 친구와 잘 지낼 수 있는 깡도 있는 어린이가 되었다.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싸우고, 울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사회화되었고 어떨 때는 내가 스스로 말을 더듬는 것도 까먹을 만큼 어디든 어울려서 놀 줄 아는 사람이 됐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처음으로 다니게 된 '여자고등학교'였다. 남자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말더듬이의 설움은 여고에서도 끝나지 않았다. 등하굣길이 같은 반 친구와 자주 대화하게 되면서 그 친구는 내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친구들 앞에서 내가 더듬은 말을 똑같이 따라하며 웃곤 했다.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여름 방학을 앞두었을 때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 따라하라고 소리쳤다. 이제서야 스스로 '잘' 말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쌓아 온 것들이 모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도 울었다. 반 친구들은 모두 조용해졌고, 내가 가깝다고 생각한 한 아이가 말했다. 그냥 재밌고 귀여워서 따라한 건데 뭐가 문제냐고. 기분 나쁘라고 따라한 건 아니지 않냐고.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는 그 친구가 나를 미워할까봐 두려워졌다. 떨어지는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때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그래도 본인이 콤플렉스를 생각하는 걸 남들 앞에서 따라하는 것이 맞는 거냐고.
나는 그 친구에게 고마웠을까? 아니었다. 모두가 미웠다. 나의 결점을 감싸주면서 싸워주는 것도 부끄러웠다. 그날 그 일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친구와 이후에 대화하며 잘 지냈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나는 볼펜을 물고 집에서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어떤 날에는 나아지지 않는 나의 이 결점 때문에, 혀를 세게 꼬집고 잡아당기며 울기도 했다.
서른이 된 나는 지금도 종종 말을 더듬는다. 특히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가족들 앞에서는 꽤 자주 말을 더듬는다. 신기하게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회사 면접을 볼 때나 중요한 자리에서는 평생 말을 더듬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유창하게 말하기도 한다. 성인이 되어 만난 편한 친구들 앞에서도 때때로 말을 더듬곤 하는데, 이제는 친구들이 말장난을 하며 그 말을 따라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예 부끄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제 나에게 '말을 더듬는 일'은 타고나게 유연성이 없는 사람, 이상하게 팔에는 털이 많은데 눈썹 털은 없는 사람. 이정도의 콤플렉스가 아닐까?
말을 더듬어서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일곱살이, 말싸움에서 절대 안(못)지는 서른 살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징글징글한 사랑 덕에 지금의 나는 말 더듬는 흉내 정도는 말장난으로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사랑해서 밉고, 미워서 한번 더 눈이 가는 사람들과 열심히 사랑하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