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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an 24. 2022

정말 함께 먹으면 더 맛있는걸까?

홍시의 계절



남편을 따라 처음 독일에 왔을  낙엽이 짙어져 가는 가을이었다. 필리핀에서 6년을 살다가 한국엔 환승하듯 잠시 머물다 왔던 독일이었으니 계절은 가을이라 했지만 나에겐 겨울이나 마찬가지였다.


필리핀에 오래 살다가 오면서 나에게는 한동안 갓 태어난 아이 마냥 나를 설레고 놀랍게 만드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과일이었다. 필리핀에 4년 정도 있다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가 봄이었는데, 나는 아파트 앞에 작은 봉고차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이 놀라운 적이 있었다. 바로


“참외가 왔어요, 참외가. 싱싱하고 노란 참외가 왔어요.”


세상에. 세상엔 정말이지 참외라는 과일이 있었다. 필리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참외를 그리 좋아했던 것은 아니라 4년 동안 잊고 있었는데, 4년 만에 들어본 참외라는 단어는 내 마음을 봄날처럼 흔들어 놓았고, 그렇게 나는 복숭아에, 딸기에, 체리에 참 많이도 흔들렸었다.


그렇게 독일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가을이라는 계절을 맞이하면서 나를 설레게 만든 과일이 있다면 바로 감, 홍시였다. 남편을 따라 슈퍼마켓에 갔다가 한참 가게 안을 빨갛고 노랗게 물들였던 체리와 복숭아와 딸기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주황색의 감들이 있었다.


“와, 독일에도 감이 있었어?”


사계절이 있는 나라라서 그런지 과일도 우리와 비슷한가 싶었는데 남편 말로는 독일에선 아직까지 감나무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다고 했었다. 살펴보니 정말로 독일에서 난 감이 아니라 터키에서 수입된 감이었다. 수입하긴 했지만 나름 단감도 있었고, 대봉도 있었는데 어떤 대봉은 의도치 않은 듯 물러져 며칠 두면 홍시로도 먹을 수 있을 법해보였다.


오랜만에 홍시를 먹는 건가 들뜬 마음에 제법 큰 대봉 4개를 집으로 가져와 나름 잘 익을 것 같은 장소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남편이 왜 먹지 않고 줄을 세워두냐 물었고, 나는 홍시에 대해 알려줬다. 대봉을 오랫동안 두면 이 안에 속 살이 엄청 부드러워지는데 셔벗으로도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얼리면 아이스홍시로 먹을 수도 있다며 대단한 것을 알려준 것 마냥 들떴었는데, 남편 왈.


“나는 처음에 감들은 다 아이스 감인 줄 알았어. 러시아에선 그랬거든.”


맞다. 남편은 그 추운 러시아에서 왔었다;) 워낙 큰 땅덩어리니 어디에 있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긴 정말 감이 익기도 전에 얼어버릴까 갑자기 궁금해졌다가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서 남편에게 신신당부했다.


“나, 홍시가 너무너무너무 먹고 싶으니까 먹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줘.”


언제 익을지 모를 대봉감이었지만 슈퍼에서 제법 익어가는 감도 보았으니 안될 것 같진 않은 마음이었다. 나는 대봉감을 부엌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매일같이 확인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이 지난 뒤 네 개였던 대봉이 세 개로 줄어 있었다. 둘 만 사는 집에 내가 먹은 것은 아니었으니 남편이 먹은 것이 분명했지만 말없이 넘어가 주었다. 나에겐 아직 세 개나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2주가 지난 뒤, 남은 단감은 두 개, 3 주가 지난 뒤에는 어느새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하며 마지막 대봉은 먹지 않겠지 생각하며 하나 남은 대봉이라도 홍시로 잘 익어만 준다면 행복하게 먹어야지 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시내에 혼자 다녀온 어느 날, 내가 대봉을 올려두었던 그곳에, 홍시가 있어야 할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었음을 발견했다. 귀납적 추리에 따라 지금껏 사라진 대봉들을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설마 그 마지막 하나 남은 감을 먹겠어…


그리고 그는 정말로 먹었다. 성질이 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어떻게 그걸 먹을 수 있지라는 신기함이 더 커서 그에게 차분히 물었다.


“그 하나 남은 대봉을 먹은 거야? 내가 홍시감으로 만들어서 먹으려고 기다렸던 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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