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걷는 숲 산책
노을 녘이 어스름해지는 저녁, 남편과 숲을 걸었다. 집 앞에 오분만 걸어가면 베를린과 그 이웃 행정구역인 브란덴부르크 사이로 이어진 숲이 있었다.
매우 울창한 숲인데 겨울엔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면 제법 사이사이 빈틈이 보이곤 했지만, 여름이 채 다 되기도 전인데 거의 정글과 같은 수준으로 푸르르다 못해 들어가는 입구부터 어둑어둑해지는 숲이었다.
이래서 독일의 숲 속엔 백설공주도 있었고, 헨젤과 그레텔도 있었구나 싶은 숲을 걷다 문득 정글과 숲의 차이가 궁금했다. 이 정도의 숲이라면 필리핀에서 봤던 정글들과도 밀집도 부분에서 뒤지지 않을 것 같은 독일의 숲이었다.
독일 하면 맥주나 축구, 학센 등을 보통 떠올리지만 사실 독일은 숲으로도 유명한 나라였다. 필리핀에서 그저 궁금하네라고만 생각하고 냉큼 삼켜버린 케이크 중 하나가 바로 블랙 포레스트, Black Forest 케이크였는데 그 까만 숲이 바로 실제 독일의 국립공원 이름이었다. 그 옛날부터 얼마나 숲에 나무가 빽빽하게 자랐으면 검은 숲이었을까 싶은 숲들이 그 국립공원 말고도 독일엔 꽤 많은데, 우리 집 근처의 숲도 남편과 내가 자주 산책하는 곳 중 하나였다.
숲을 걷다 보면 새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다양한 새들의 소리를 듣곤 하는데 나의 어릴 적 꿈 중에 하나는 디즈니의 주인공들처럼 새들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숲에만 들어가면 들리는 대로 새들의 소리를 따라 하는데, 한참 숲 속의 새소리를 따라 하며 눈으로 찾아가다 문득 남편에게 물은 것이었다.
정글과 숲은 뭐가 다르지?
새소리를 따라 하다 뜬금없이 던진 질문에 남편이 웃었다. 숲이 뭐고 정글이 무엇인지 각각 대충은 알지만 막상 숲과 정글의 차이는 뭔지 애매했다. 그 와중에 남편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In the jungle, the mighty jungle
the lion sleep tonight ~
라이온 킹에서 티몬이 부르는 노래였다. 정글 안에, 아주 거대한 정글 안에 사자가 자고 있다는 노래 가사. 그러면서 남편은 답했다.
사자가 사는 곳이 정글이 아닐까? 열대 우림의 습도가 많은 지역.
정글북도 그렇고 라이온 킹도 그렇고 정글 하면 떠오르는 그 특유의 이미지가 생각났지만, 막상 만화 속 사자가 아닌 실제 사자는 정글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근데 사자는 사바나에서 살지, 정글보단 초원이 더 가깝지 않아?
그러자 남편과 나는 다시 숲 속의 거대한 어둠처럼 미궁의 숲으로 빠졌다. 숲이랑 정글을 다 알면서도 정작 그 둘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갸우뚱해하는 호모 사피엔스 어른 두 명. (나중에 알고 보니 정글이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의 jangala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뜻이 바로 숲;) 정글도 큰 의미에선 숲이지만 숲 중에서도 우림의 한 형태로, 숲은 보통 지나가는 게 가능하지만 정글은 지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며, 특별히 더운 지역의 우림을 의미한다고 한다.)
해가 저물자 숲은 더 어두워졌고, 그래서 걷는 발걸음 걸음 하나하나 더 조심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거대한 말똥 때문이었다. 아무리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와는 정말 다르게 베를린을 경계에 둔 브란덴부르크는 전남 함평군 **읍 **리가 떠오르는 풍경이 장엄하게 펼쳐지곤 한다. 길을 걷다 보면 말똥 냄새가 마치 청국장처럼 코끝에 퍼지는 게 오죽하면 나도 모르게 전원일기의 ost가 떠오르곤 했다.
거대한 말똥들을 듬성듬성 피해 가다가 문득 개똥은 주인들이 치워가는데 말똥은 주인들이 치워가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개도 숲에다 똥을 싸면 주인이 치워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고 남편이 묻길래, 그럼 말이 숲이 아니라 도로에 싸면 치워가야 해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남편이 어제 서점에서 쥐어 들었던 Das Kapital, 자본론을 가지곤 어떻게 설명했을지 물었다.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언뜻 모든 이론들의 역할이 그렇듯 설명이 될 것 같았다. 말똥을 치우지 않아도 되는 이유라면 말똥의 사용가치인 단순히 어떤 생명체의 분뇨만이 아닌 자연의 거름이 되어 숲의 생태계에 이바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놔두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분뇨를 모아 비료로 만들어 팔면 그게 또 교환가치를 생산할 수도 있지 않겠냐며 대답하고 나니 또 한 번 내가 그래서 사회과학을 좋아했지 떠올랐다.
어제 갔던 독일 서점의 맨 꼭대기 층에는 수많은 사회과학 철학 서적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생각해보니 마르크스는 물론, 베버, 니체, 칸트, 쇼펜하우어 등등의 대학시절 때 읽었던 서적들이 무려 원서로 놓인 나라에 살고 있었다. 독일 사람인 남편도 아직 읽어보지 않은 철학책들을 내가 이미 읽었다는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오히려 나는 요즘 그런 책들에 예전만큼의 매력을 느끼지 않아 언어나 여행, 젠더, 사진 관련된 책들을 살펴보고 있으면 남편은 괜히 사회과학 클래식 책들을 열어보곤 했다.
나도 육십 정도 되면 읽어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