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선인장 Aug 07. 2022

생일 케이크 위에 뭐라고 쓰지

베이킹은 어려워

남편의 생일날, 나는 케이크를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나에겐 밥솥이 있으면 됐지 오븐이 왜 필요한지 모르고 삼십년 넘게 살아오다가 유럽에 살게 되면서 오븐과 밥솥은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븐은 남편 것, 밥솥은 내 것으로 역할이 분리되어 담당해왔는데 그렇게 된 가장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내가 정말 베이킹은 잘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면 할수록 베이킹은 과학이다. 엄마나 할머니에게 이 음식은 어떻게 만드냐고 물으면 두 분은 항상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이렇게 저렇게 섞어서 오물조물하면 세상 쉬운 것이 그것이라고 하시는 분들이기에, 나는 베이킹을 하기 위해 재료들을 계량하는 것부터 흥미가 뚝 떨어지곤 했다. 몇 번을 실패한 베이킹 이후부터는 정말 정석대로 레시피를 철저히 따라 했지만, 그럼에도 번번히 제대로 된 빵굽기를 실패하고 나서부턴 베이킹은 사먹는 것이 제일 맛있고 싸다는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문제는 독일빵은 내가 좋아하는 빵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나는 폭신폭신하고 가벼운 쉬폰, 스폰지 케잌들을 좋아하는데 독일의 일반 베이커리에는 보통 꾸덕꾸덕하고 질퍽질퍽한 느낌의 케잌들이 주를 이뤘다. 패스트리나 크로와상보다는 잡곡, 호밀, 통밀빵들이 더 맛있고 가성비도 좋다. 그래서 내가 먹고 싶은 빵들은 시내에 있는 몇몇 일본빵집이나 프랑스빵집을 찾아 가야하는데 가격도 높고 찾아가기도 멀어 괜시리 오븐을 자꾸 만지작 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남편 생일날, 나는 오랫만에 다시 오븐을 열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독일에선 찾기 힘든 고구마 케이크를 녹차스폰지 케이크를 베이스로 만들어 보기로 마음 먹었다. 며칠 전부터 한인마트에서 달달한 고구마를 사놓고, 인터넷에서 가장 쉬운, 누구라도 실패하지 않을거라는 레시피들을 찾아서 신중하게 리스트를 만들었다. 하루 전 싱싱한 크림과 재료들을 미리 구비해두고 생일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오븐을 켰다. 남편이 회사에 나서고 부터 바로 베이킹을 시작했는데 혹시나 첫번째 케이크가 실패한다면 두번이고 세번이고 제누와즈를 될때까지 시도해보겠노라고 다짐하고 일찍 부터 계란을 깠다.





그렇게 차분한 노래와 화면을 담은 녹차제누와즈 만들기 영상을 따라 빵을 구웠는데, 어랏, 한 번에 성공한 것 같았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운데 크림을 바를 수 있게 두 세번은 자를 수 있는 크기로 부풀어 오른 것 만으로도 나에겐 무척 큰 성공이었다. 제누와즈가 열기를 식히는 동안, 고구마를 삶아 으깨고 식혔다가 크림을 섞어 케이크를 꾸밀 준비까지 완료. 남편이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제누와즈를 꺼내 크림을 삼단으로 바르고 마지막으로 케이크 표면을 장식하려고 하는데 막상 무엇을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멍해졌다. 남편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데, 문을 열면 짠하고 보여주고 싶은데, 얼른 떠오르는대로 급하게 적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짜잔하고 보여줬다.


며칠전부터 호들갑을 떨며 케이크를 만들거지만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미리부터 기대치를 확 내려줬기 때문에 남편은 내가 들고 있는 케이크가 실제 다른 케이크들처럼 높이가 있게 서있는 것을 보고 이미 크게 놀라워 하고 있었다.


“드디어 해냈구나!!”


그렇게 옆면을 보던 케이크를 눈 앞으로 내리던 순간, 남편이 한 번 더 크게 웃어버렸다.


“Such a Korean, my 아내”


이번에는 내가 만든 케이크가 케이크의 형태대로 서있긴 했지만 다른 금손분들이 만든 케이크처럼 너무 예뻐서 차마 먹을 수 없는 비주얼보다는 옛날 아낙네들이 가지고 다니는 광주리에 담긴 펑퍼짐하고 재료 본연의 색을 그대로 간직한 떡에 더 가까운 모습때문에 남편이 웃는 줄 알았다. 생일 축하한다고 케이크를 들고 있었지만 이내 풀이 죽어 말했다.


“생일 축하해 축하해. 그런데 케이크는 안예뻐.”


“아니야 케이크 예뻐. 아주 예뻐. 다만…”


안예쁜건 알았지만 그 외에 다른 이유가 또 있는지는 몰랐다. 뭐지 싶어 갸우뚱하는데 남편이 이어갔다.


“나이가 이렇게 떡하니 한 가운데 써져 있다니 ㅋ”





케이크를 만드는 것에만 너무 신중한 나머지 정작 케이크가 만들어지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을 때, 나도 몰래 꾸민 것이 남편의 나이였다.ㅋㅋㅋ 서른이 넘어가면 특별히 몇 살인지 굳이 손꼽아보지도 않고, 또 유럽 사람들은 나이에 그리 연연하지도 않는데 나는 이렇게 떡하니 그가 올해 몇 살이 되는지 케이크에 박제해버렸다. 남편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이렇게 한국 사람이었다니 새삼 놀라운 순간. 내년에는 케이크 위에 나이 말고 무슨 말을 적을지 미리 생각해놓아겠다;)








이전 22화 에미넴 랩에 맞춰 보드게임 하며 맥주를 마시는 시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