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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곳에서 떠나는 가장 먼 여행

비건

by 따뜻한 선인장 Mar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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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영혜처럼 꿈을 꾼 것일까?

아직 내 생체리듬이 한국을 따라가는지, 독일 시간을 따라가는지 모르게 흘러가는 와중에 내 배꼽시계는 우선 남편의 시간을 따라가고 있었다. 뭐라도 요리를 할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직 시차때문에 잠이 너무 왔고 무엇보다 어떤 요리를 해야 비건이 되었다는 남편과 함께 먹을 수 있을지 감이 잘 오지 않았기도 했다.


한강님의 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비건 선언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내가 그 상황에 놓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다. 분명 두 달 전 가족들을 만나러 한국으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나와 같이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모든 음식들을 탐험했는데, 두 달 만에 한국에서 돌아오니 그는 비건이 되어 있었다. 매우 갑작스러운 일이긴 했다.

 

사실 화상통화로 이미 그는 내가 가족들을 만나러 한국으로 떠난 후부터 비건식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그가 만든 비건식을 종종 공유하곤 했다. 다만 나는 오랜만에 들어온 한국에서 그동안 먹고 싶던 음식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다녔기 때문에, 사실 그의 비건 선언이 내 관심을 전혀 사로잡지 못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독일로 돌아온 집에서 내가 오랜만에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정말 그가 비건이 되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두 달 전과는 사뭇 다르게 눈에 띄는 각종 곡물과 야채, 과일들만 가득한 냉장고. 그제야 나는 도대체 왜 그가 갑자기 비건이 되었나 곰곰이 떠올려봤다.


채식주의자 속 영혜처럼 강렬한 꿈을 꾼 것일까?

내가 그동안 만들어준 음식들이 맛이 없었나?



맛있는 배달도, 음식점도 없는 우리 동네

음식에 관련한 생각들이 소시지처럼 대롱대롱 이어지다 생각해 보니 사실 그가 그리 갑자기 비건이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독일 내에서는 비건들의 천국인 베를린에 함께 살 때부터, 워낙 어딜 가나 비건 옵션이 다양하고 또 그 맛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종종 비건이 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베를린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다들 각자의 엄마 손맛을 그리워하며 만들어내는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 신기한 음식들을 하나 둘 시도해 보는 것도 바빠 비건을 고수하기 어려웠었다. 그러다가 지금 이곳, 독일에서 그래도 가장 맛있다는 터키식 케밥, 되너도 맛있는 곳을 찾기 어려운 동네로 이사 오고 말았다.


이사 온 초반에는 부푼 마음을 가지고 주변의 음식점들을 몇몇 시도해 보긴 했지만 그것도 가격대비 부질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는 우리는 대부분의 식사를 집에서, 혹은 친구네 집에서 만들어 먹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입맛을 자극하는 맛들을 외부에선 찾을 수 없다 보니 나는 더 요리에 집착하게 되었고, 남편은 반대로 어차피 비슷한 맛들이라면 건강하고 간편한 식단을 찾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는 와중에 하루에 한 끼는 밥을 먹고 싶은 나에게 남편이 해주는, 나에겐 밥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그 밥은 절반의 확률로 내 허기를 달랬다.


내 마음은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크림과 토마토와 고기만 있는 외국 음식만 먹다 보면 어느 순간 빨간 토마토 뇨끼가 맵고 개운한 떡볶이이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게 되듯이, 개운함과 느끼한 맛을 모르는 남편이 해주는 음식만 먹기엔 나는 여전히 너무 한국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거나 잘 먹는 남편은 내가 해주는 요리를 더 자주 먹게 되었고, 그러다가 내가 두 달이나 집을 비우게 되었으니 이제 남편은 드디어 자신이 무엇을 먹을지 온전히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 한국에 돌아가는 짐을 싸고 있을 때부터, 남편은 내가 한국에 가면 한번 제대로 비건식을 먹어볼 것이라고, 그러니 냉장고 속에 있는 음식들을 최대한 많이 끝내놓고 가면 좋겠다고 자주 언지를 해두었었다. 다만 나는 거의 2년 만에 돌아가는 한국 일정에 먹고 싶은 음식들이 머릿속에 하나 가득이라 남편이 어떤 비건 음식들로 두 달은 채워나갈지는 솔직히 아주 궁금하지는 않은 터였다.


그런데 이제, 그 황홀하고 풍요롭던 한국에서의 두 달이 끝나고, 남편과 함께 다시 독일집 주방에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 지금, 이제는 비건이 되었다는 남편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궁금했다.



우리 집 국제공항, 야채 냉장고

우선 우리 집 집밥을 책임지던 밥솥에는 퀴노아와 귀리, 통밀 등 유럽에서 나는 건강한 통곡물들이 가득했다. 밥 솥 안에는 검정콩과 검정쌀이 가득할 때 나타나는 아주 진한 보랏빛이 밥솥의 그림자처럼 가득해서 밥솥을 얼핏 보면 검은색 내솥만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자세히 다시 살펴보면 밥솥에는 보랏빛으로 물든 잡곡들 하나하나가 제법 다양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식수대 주변에선 이런 짙은 보라색과 파란빛이 섞인 미세한 얼룩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검은색의 곡물들을 씻다 물든 자국인가 싶었는데, 물을 넉넉하게 머금은 수건으로 얼룩을 닦으며 남편은 이게 검정콩이 아니라 보라색 적양배추 자국이라고 했다. 자를 때인지 씻을 때인지 모르게 사방에 물이 튄다며 해맑게 지워 보이는데, 나는 내가 먹는 음식 재료에 이렇게 파란 물을 들이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것에 새삼 신기했다.


다시 냉장고의 문을 열어보는데, 야채칸에 있는 채소와 과일이 새삼 나의 눈을 부시게 하는 느낌이었다. 이 눈부심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보통 독일식 아침식사라고 하면 옅은 베이지 색깔의 빵과 연한 핑크색이나 노란색을 가지고 있는 차가운 소시지, 햄, 버터나 치즈들이었다. 이 재료들이 대부분일 때 냉장고 문을 열면, 눈이 부시지 않았다. 새빨간 핏물을 다 빼고 난 뒤 살색도 분홍도 아닌 밍밍한 색감의 돼지고기 덩어리처럼 이 음식들은 대부분 원래의 색감에서 한참 채도를 낮춘 색깔로 재가공된 것이다.


가공된 음식들이 섞여 있던 냉장고에서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가 가득한 냉장고를 열어보고 나니 새삼 세상의 많은 식재료들이 이렇게 눈부신 색깔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 재료들도 수많은 다양성 중에서도 특히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키우기 쉽고 많이 자라는 아이들로 선별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채소와 과일이 가득한 냉장고의 문을 열어보니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시각적 자극으로 눈이 부셨다.


그 눈부심을 발산하는 각각의 채소와 과일들을 살펴보며 이 친구들도 모두 독일어로든 한국어로든 고유의 이름들을 하나씩 갖고 있었고, 신기하게도 인간들 못지않게 각각의 피부색과 국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다양함이 냉장고라는 국제공항처럼 새하얀 백열등 조명을 가진 심플한 사각 공간 안에 들어 있어, 냉장고 문을 열면 사뭇 야채들의 국제공항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나와 남편의 주방

가을부터 봄까지 그 긴 시간 동안 날씨는 한결같이 흐리고 사람들의 옷색깔도 보통 무채색이 대부분인 독일의 겨울은 사실 색감으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공간들이 별로 많지 않다. 그런데 그 몇 안 되는 공간이 우리 집 냉장고 안에 자리를 틀 줄이야. 두 달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제아무리 나를 잘 알고 있는 우리 엄마가 와도 고춧가루나 젓갈이 어디에 있는지는 꼭 나에게 물어봐야 하는 우리 집 냉장고처럼, 사람은 자신의 공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부분까지도 한 치 앞도 모른다.


분명히 낯익으면서도 낯선 공간이 된 주방을 살펴보며, 나는 그 다양한 색감들이 냉장고 속에서만 자리를 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주방의 향신료 칸에도 노랗고 빨갛고 푸르고 어두운 형형색색의 향신료들이 늘어나 있었다. 고춧가루와 들깻가루, 각종 장류와 액젓 등 나름 한식 재료로는 여러 가지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나였지만,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인도, 터키와 지중해까지 유럽과 한국 사이에 놓인 남아시아와 중동의 향신료들은 어찌나 다양하고 풍성한지 나는 감히 엄두도 잘 내지 못했던 재료들이었다.


한국의 재료들로 만드는 채식이나 비건 음식들이라면 나는 얼추 어떤 재료와 소스들로 어떻게 만들면 되겠다는 그림이 그려졌는데, 남편이 만들 비건 음식들은 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 상상을 방해하는 요인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이 향신료들이었다. 언제나 궁금하긴 했지만, 이것들이 각각 어떤 맛을 내고, 또 서로 다른 향신료들이 섞였을 때 어떤 조화를 이뤄내며, 그것이 마지막으로 다른 야채들과 만나 내 입에서 씹혔을 때 마지막으로 어떤 맛을 내 입안에 남길지는, 수많은 미지수가 엮인 수학 공식값처럼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떠나보는 여행, 비건 생활

내가 만든다고 하면 어떤 것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손이 잘 가지 않던 향신료들이었지만, 남편이 누군가에 의해 이미 한번 검증된 레시피를 바탕으로 만들어주는 향신료 조합이라면 나는 세계여행을 떠나는 마음처럼 언제든 시도해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행은 언제나 몸이 새로운 곳으로 떠날 때만 시작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내가 매일 같이 머무는 우리 집, 나의 공간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주 익숙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새삼 낯설고 새롭게 느껴질 때, 그때 우리는 어디에서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채식은 내 주변에서 가장 가깝게 떠나보는 여행 같은 것이 아닐까. 남편이 그 여행의 티켓을 먼저 끊어 놓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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