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함의 끝에서 이쑤시개를 꺼내다

어릴 적 그렸던 검은색 도화지 위 스크래치 그림

by 따뜻한 선인장

병원에서 퇴원하고 매일매일 이보다 더 바닥을 칠 수 있을까 싶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며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행복이 오래가지 않음에 아쉬워하지만 사실 그 말의 다른 의미는 슬픔 역시 영원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행복에 끝이 있다면 슬픔에도 끝이 있다 (그렇게 믿을 것이다).


사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에도 내가 처한 상황이 변한 것은 없었다. 갑작스레 뇌출혈이 와서 입원을 하고,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첫 남자 친구와는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하고 헤어졌고, 그렇게 고대하던 첫 회사도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영구 휴직으로 변한 절망적인 내 현실은 변한 것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매번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내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달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똑같이 우울해하고 힘이 빠지며 슬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만 한 달 넘게 있으니 그 우울함도 질려갔다. 사실 마냥 우울해만 하는 것도 굉장히 피곤하고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슬퍼하는 것에도 에너지가 필요하구나를 깨달아갔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몸이 아프다 보니 화낼 에너지도 없다는 말처럼 우울해할 힘도 없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비교하는 것도 피곤하고, 슬픈 것도 힘이 들고, 그렇게 아무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것에도 축 쳐지는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느 날부터는 기쁨도 슬픔도 없는 무언가 무색의 감정에 다닫게 되었다.


문득 아주 어릴 적, 어린이집에서 자주 하던 그림 그리기 시간이 떠올랐다. 칠하고 싶은 모든 색을 하얀 도화지에 가득 채운 뒤, 그 위에 다시 검은색 크레파스로 다른 색을 모두 덮어 도화지를 까만색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쑤시개나 날카로운 펜으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면 까만 도화지 위에 더 밝게 빛나던 검은색 뒤의 무지갯빛 색깔과 새로운 그림.



출처: schoolspeciality.com



어떻게 보면 여태껏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새하얀 도화지에 내가 살면서 해보고 싶은 다양한 경험의 색들을 가득 채워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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