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 후 첫 검진
퇴원 후 2개월, 드디어 병원에 경과를 확인하러 가는 날이었다. 엄마와 예약 시간보단 약간 이른 시간에 미리 진찰실 앞에 앉아 있었다. 스물다섯 살, 내 토끼해의 첫날인 새해에 우연히 넘어졌던 것이 어쩌다 뇌출혈이 되버린, 지지리도 복도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앉아 있었는데 마침 옆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 어린 꼬마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많아봐야 4-5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남자아이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엄마 품에 기대어 있었다.
뇌출혈로 입원한 병실에선 이십 대인 나 한 명 대 육십 대 이상 할머니분들이 다섯 분이셨으니 병실에서 본 사람들만 하더라도 젊은 환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은 병이었다. 게다가 이십 대 내 친구들 중에서도 뇌출혈을 걸려본 사람은 나뿐이었으니, 나는 뇌출혈에 걸린 사람 중엔 내가 제일 어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지금 나와 같이 진료실 앞에 앉아 있었다. 이건 무슨 일일까. 무슨 이렇게 어린아이가 여기 진료실 앞에 앉아 있을까? 그제야 병실에서 할머니들이 나를 보던 눈빛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도 했다.
의아해하긴 했지만 내 코가 석자였고, 관심을 갖기엔 누구보다 복잡한 심정을 알기 때문에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지 자신이 없었고, 내가 저 진료실 문을 넘어가면 어떤 결과를 들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기로 했다. 그렇게 진료실 앞 어린아이 한 명과 젊은 아가씨 한 명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두 어머니라는 존재들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그 꼬마의 어머니와 우리 엄마 사이에 작은 대화가 트였고, 나는 어렴풋이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 어린아이는 놀이터에서 뛰어놀다 사고로 뇌출혈을 진단받았다고 한다. 원래는 회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잘 돌아갔었는데, 한 해가 지난 뒤 갑자기 다시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증상이 반복돼서 어머니는 재발이 염려된다며 다시 병원에 오게 된 상황이라고 하셨다.
나는 여태껏 병원에서 다른 뇌출혈 환자들도 만났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가장 젊은 아이였다. 또 퇴원 후 일상에서 만난 친구들은 지극히 건강한, 자신에게 지금 주어진 업무들을 해내느라 고생하는 이제 갓 사회초년생인 바쁜 친구들만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나야말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비운의 여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아이를 보니 나는 적어도 그 아이의 나이 즈음엔, 내가 어릴 적엔 마음껏 뛰어놀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엔 시간과 순서의 차이가 있는 듯했지만, 일단 태어났다면 그 다음부터는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듯 했다. 나는 나에게 찾아온 큰 병을 이렇게까지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내가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너무 새파란 나이에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굳이 지금의 나이가 아니었더라도, 지금보다 더 어렸거나 더 많았더라도 아마 지금처럼 받아들이기 힘들, 그냥 큰 병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기 힘들어서 붙여진 이름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어머니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그냥 조용히 아이가 다시 마음껏 놀이터에서 잘 뛰어놀길, 지금의 내가 나의 4-5살 때의 기억이 아주 희미해졌듯 이 아이에게도 그런 마법이 아주 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나길 기도해주었다.
그사이 내 이름이 진료실에서 불렸고, 나는 다시 나의 머릿속에 허 일어나는 일과 마주하러 의사 선생님이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말을 굉장히 아끼시던 선생님으로 기억했는데 정말이지 차트를 보는 내내 방안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했다.
“이제 뒤쪽에 고여있던 머리의 피도 거의 다 사라진 것 같네요. 여러 검사들을 했지만 특별히 유전적인 이유나 혈관기형 같은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단돼서 지금으로서는 새해에 입었던 외상이 주원인인 것이 더 명확한 것 같네요.”
머리의 피가 다 말랐다니. 뇌출혈 증상이 갑작스레 찾아온 삼일절부터 정신을 놓지 않으려 무척이나 긴장했던 것이 한순간에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몸은 그래도 나아졌다니, 정말 천만다행인데 왜 이리 피곤하고 힘이 더 빠진 느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