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어릴 적 고향집에는 비가 오면 처마 밑에서 낙숫물이 떨어졌다. 떨어지는 낙숫물로 인해 파이는 땅바닥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지붕을 쳐다보고... 맑은 빗물이 모여 느닷없는 개울을 만들어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 계단으로 흘러내리면 때아닌 폭포가 우리 집 앞에 만들어지곤 했다.
장화를 신고 우산을 받쳐 들고 언덕 위 학교로 가다 보면 길가로 흘러내리는 누런 흙탕물에 학교 갈 생각은 잊고 장난치기 일쑤였고, 교실에 모인 코찔찔이 개구쟁이들은 다들 물에 빠진 생쥐 꼴에 며칠씩 목욕탕도 못 간 몸에서 발산되는 체취에 지금이라면 코를 막기 일쑤였다.
쉬는 시간 잠시 멈춘 비에 불어난 학교 옆 도랑에 버들잎 따서 둥글게 말아 돛단배를 만들어 친구들과 띄워놓고는 누구 배가 더 멀리 가나 시합을 하고, 학교가 끝나면 흙바닥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는 집에 가 흙탕물이 든 빨래 내놓았다가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을까 두려워하며 돌아가기도 했다.
마루에 앉아 문을 열고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BGM 삼아서 계림 문고를 읽다 보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사위에 놀라 방에 들어오고, 저녁 먹고 자리에 누워 있다 보면 아버지 어머니 코 고는 소리와 빗소리의 콜라보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다.
사춘기가 되어 고1 첫 미팅 때 우산 한 장을 같이 쓰고 여학생과 걸었던 영랑호 수면 위에 떨어지던 빗방울의 파열음과 수없이 만들어지던 동그라미, 그리고 비를 피하기 위해 내 곁에 바짝 서는 바람에 문득문득 닿은 그녀의 젖무덤에 흠칫흠칫 놀라던 때,
그리고 20대 초반 피 끓던 시절, 우산 하나에 공설운동장 관중석에 같이 앉아 입술에 피가 나도록 비벼대던 첫사랑과의 우중 키스.
이제는 낙숫물 소리는 들을 수도 없고, 낙숫물에 패이는 땅바닥과 처마는 구경할 수도 없지만, 우산을 같이 써도 가슴이 터질듯한 설렘이 드는 여인도 없지만, 이런 날이면 차를 몰고 나가 후드득 거리는 빗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