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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폐인작가 May 27. 2024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고찰


싫은 것에는 백만 가지 이유를 갖다 댈 수 있지만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나는 좋아하는 것이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예를 들자면, 좋아하는 배우는 실물을 직접 봐야 한다던가, 마음에 드는 영화나 음악은 반년 동안 하나만 계속 반복한다던가, 방을 꾸밀 땐  녹색과 분홍색을 고집하고, 잠봉뵈르 샌드위치는 가게마다 맛을 봐야 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앞뒤 재지 않고 머리 풀고 달려야 만족한다. 질리고 질릴 때까지 해야 그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달까.


‘언니 그거 집착이야.’  어쩌면 동생의 말대로 나는 어떤 대상이든 빠지면 ‘집착’ 수준으로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무언가에 빠져 일명 ‘덕질’ 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어릴 때부터 이런 나를 유별나다고 여긴 부모님은 이번에는 얼마나 갈지 한 번씩 내기하곤 한다.


그렇다. 나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좋아함의 기한’이 있다. 이게 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나는  대상이 어떤 것이든 정해놓은 기한을 넘으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보통 한 달, 길어봤자 삼 년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에는 기한이 없다. 집착 그 이상으로 빠져있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하고 최근 이사를 하며 깨달았다.


짐정리를 하던 중 내가 썼던 수많은 공책을 발견했다. 먼지가 겹겹이 쌓여 거미줄까지 엉켜있는 버려도 상관없는 얇고 두꺼운 공책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표지에 2학년 7반 26번 일. 기. 장이라고 검은 매직으로 대문짝만 하게 적힌 캐릭터 공책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큼직하게 써 내려간 일기에는 한참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어린 고뇌로 가득 차있었다.


눅눅하게 눌어붙은 종이를 한 장씩 떼내면서 엄마가 나물반찬만 해줘 서럽다는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일기장을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 얇디얇은 공책을 다 읽는 것은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웃음이 났다. 그 옆으로 빼곡히 쌓여있는 수많은 공책들을 보니 글쓰기 동료들을 만난 것 같아 든든했다. 혼자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학년이 올라갈수록 일기장이란 탈을 쓴 공책들은 두꺼워졌으며 내용은 길고 어두웠다. 성인이 되고 지난달까지의 스프링 노트들을 후루룩 펼쳐보다 더는 보기가 힘들어 덮었다.


내 몸을 내가 직접 부검하면 이런 기분일까.


이젠 전부 과거가 돼버린 감정들. 고민들. 글자들. 어떤 때는 검정 볼펜, 또 어떤 때는 파란 볼펜, 녹색, 빨간색, 주황색 등 갖가지 색으로 날마다 다르게  꾹꾹 눌러쓴 글들은 볼록 튀어나온 내 뱃살처럼 종이와 함께 불룩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내가 아닌 날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당시에는 치열하고 너무나 가슴 아팠던 일들이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인걸 알았을 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안도감이 날 기쁘게 했다. 그 일들을 겪고도 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구나 나는 여전히 계속 글을 쓰고 있구나. 그리고 나만 여전히 글쓰기에 진심이구나.






“저기요, 사람들은요. 언니 너처럼 그렇게 쓰지 않아요 생각보다.”

 

너는 일기 안 쓰냐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글쓰기의 글 자도 극혐 하는 동생은 내 말을 듣자마자 기관총 쏘듯 우다다 대답을 갈겼다. 무방비 상태에서 내 가치관이 상처 입었다고 느낀 나는 일기란 어떤 것인가 일목요연하게 연설을 했다. 그러자 동생은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붸붸붸~이상한 소릴내며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동생을 볼 때면 나는 현실 자각을 하게 된다. 꿈에서 한 발짝 나오는 것 같달까?  주변을 둘러보면 성인이 된 후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가족, 친구, 지인 그중 누구도 쓰지 않는다. 그래도 교복 입던 시절에는 친구와 함께 삼국지에 대해 감상을 나누고, 하다못해 수행평가로 주어진 책으로 글을 쓰고 발표했는데, 그것 참 재밌었는데. 동생도 말로는 싫다 하면서 짧게 짧게 일기를 남겨 몇 개월치 썼다고 자랑한 적 있었는데. 그랬는데. 지금은…


이 씁쓸한 현실에 대해 섭섭함을 느낄 때 나는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애정하는 글쓰기 모임의 존경하는 분들이 글을 쓰고 있고, 브런치에서 수많은 작가들이 글을 올리고 있으며 공모전에 도전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전국에 널렸다는 그 사실이 나를 외롭지 않게 한다.


사람과 물건에 대해 정해진 기한이 있어도 이 너저분하고 알록달록한 방에서 글 쓰는 행위에 대해선 무기한 연장으로 좋아할 것 같다. 방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상자 세 박스 속 꾸역꾸역 담긴 일기장들을 보니 단언컨대 나는 말할 수 있다.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나와 글쓰기는 결코 질릴 일 없을 거라고.


앞으로도 영원히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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