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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cos Sep 26. 2021

밀란쿤데라의 '불멸' : 인간실존에 대한 메타포

불멸은 제목 그대로 불멸을 바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형식 면에서 독특한 전개방식을 구사하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 중심이 아니라 작가가 중간에 개입하여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애초부터 스토리가 중요하다기보다 작가의 관념을 은유로 전달하려는 것이 목적으로 느껴졌다. 


저자 쿤데라는 수영장을 바라보던 중 60대 여인의 몸짓을 바라보고 불현듯 '아녜스' 라는 인물을 상상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아녜스는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성격이고 세상에 잊혀지길 원한 반면 그녀의 동생인 로라는 눈에 띄이는 행동을 하며 자신의 이미지 형성에 집착한다.


중간에 액자식으로 전개되는 괴테의 이야기에선 26살의 여성 베티나가 나타나 끊임없이 괴테를 사랑한다. 괴테는 생전에 베티나로부터 벗어났으나 괴테 사후 주고받은 편지들이 그녀를 통해 각색되어 책으로 출판됐다. 그리고 베티나는 영원한 연인으로 역사에 남게 되는데, 소설 속 로라 역시 육체적 관계를 통해 존재감을 느끼며 여러 남자를 만나는 점에서 불멸에 대한 욕망은 공통적이다.


로라는 남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자 자살 등을 암시하며 주변인들의 마음을 흔드는데, 이는 진심이라기 보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온전한 자아를 위해 세상과 거리를 두는 아녜스의 입장에선 못마땅할 따름이다. 로라는 짝사랑하던 형부와 사귀게 되며 다른 사람의 기억에 남으려고 한다. 이 묘한 삼각관계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싶어했던 아녜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괴테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며 괴테 사후 헤밍웨이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둘을 서로의 불멸에 대해 옥신각신 하는데 괴테는 죽고 난후 이미지에 대한 집착은 덧없는 것이며 진정 나아갈 방향은 소멸임을 얘기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 속에 알리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좋은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애를 쓰고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나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비단 정치적 영역에서도 이데올로기는 퇴색되고 이미지 정치가 먹히는 것을 빗대어 소설 속에선 이마골로그란 신조어가 사용됐다. 그런 이마골로그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는 본질이 어떻든 타자가 어떻게 인식하는 지가 주된 관심사다. 


타인의 시선으로 너무 초점이 맞춰지다보면 나를 잃어버려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주변에 SNS 와 현실간 괴리된 삶을 보더라도 잘 느낄 수 있다. 오히려 그런 염증 때문에 SNS 소통을 꺼리게 되고 차라리 나의 본질을 풀어낼 수 있는 텍스트에 집중하게 되는거 같다. 소멸로 귀결되는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면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해보게 되는 책이다. 



어떤 아녜스 어떤 폴도 컴퓨터에 기획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어떤 원형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개인적 본질도 없는, 그저 원 모델의 단순 파생물인 여러 견본들에서 뽑아 낸 인간 존재일 뿐인 것이다. (중략) 인간이라는 견본품에 있어, 일련번호란 바로 독특하고 우연한 특징들의 조합인 얼굴이다. p.24


우리를 우리 자신에 동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열정적인 동화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에 인간 원형의 단순한 한 변이체로 비치지 않고,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고유의 본질을 지닌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p.25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작은 불멸,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과 큰 불멸, 생전에 그를 몰랐던 이들의 머리 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 p.82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법과 뺄셈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 p.155


마르크스의 유산이 이제 더는 어떤 논리적 관념들의 체계가 아니라, 다만 일련의 이미지와 암시석 상징의 연속을 이룰 뿐이므로 당연히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총체적이고 전 지구적으로 서서히 이마골로기로 변해 버린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모든 이데올로기가 패했다. 그들의 도그마가 결국 환상임이 드러났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p.175


(로라) 내게 있어 진정한 삶이란 그런 것 같아. 다른 누군가의 생각 속에 살아 있는 것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난 산송장이나 다름없어. p.238


베티나와 로라의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p.249


(괴테) 당신의 이미지가 당신과 전혀 무관하다면, 어째서 당신은 생전에 이미지에 그토록 많은 정성을 쏟았지요? 자기 이미지에 대한 염려, 그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미숙함 아니겠습니까. 자기 이미지에 무심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 정도의 무심함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겁니다. p.326


자네의 생각이 잘 이해되지 않는군, 지금 자네가 쓰는 것이 정확히 어떤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네, 요즘 사람들은 글로 쓰인 건 무엇이건 모조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혹은 만화로 개작하려 하네. 그러나 소설에서 본질적인 건 오직 소설로만 말할 수 있기에, 어떤 형태로 개작하건 각색을 하면 비본질적인 것만 남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을 쓸 만큼 미친 작가라면, 그리고 자기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는 사람들이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 이야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네. p359.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다. 조물주는 자신의 컴퓨터 덕택에 무수한 자아와 그들의 삶을 이 세상에 들여 보냈다.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런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p.389


우리는 우리 이미지 뒤에 숨을 수 있고, 우리 이미지 뒤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우리 이미지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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