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을 빼앗겨버렸다.
"가족 여러분. 모두 저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십시오!"
7개월 만에 다시 병원에 가기 전날 밤. 내가 거실에서 외친 한마디였다.
"지지합니다. 근데, 왜?"
"병원에 갈 거야."
그 누구도 어느 병원에 갈 거냐고,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 않았다. 2초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2층 침대에 누운 동생이 먼저 정적을 걷어냈다. 내일 병원 다녀오면 피자를 시켜 먹자, 그래 좋아. 존스페이버릿 먹자. 파파스 데이야. 그거 좋지. 근데 그거 알아? 존 아저씨는 이제 파파존스에 없대. 이런 시답잖은 주말 점심 메뉴를 정하는 대화를 하고, 한바탕 웃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은 적막 없는 아침을 맞았다. 부모님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36주 낙태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 소리. 그 뉴스에 분노하는 엄마의 말과 그저 추임새만 넣는 아빠의 목소리. 눈을 끔뻑이며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알람 소리도 듣지 않고 잠에서 깨는 날은 왜 항상 일찍 일어나는 걸까?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친 고양이가 앵앵 소리를 내며 거실로 나오라 채근한다. 다시 잠에 들고,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운 좋게 등교하는 막내와 함께 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무더위에 땀을 흘리지 않고 내 몸이 옮겨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익숙한 건물에 들어서고 익숙한 엘리베이터에 올라 늘 누르던 층수를 눌렀다.
두근. 두근. 두근! 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불안이 내 몸을 감쌌다.
십여 년이 넘게 함께한 내 인생의 조연은 아직도 나와 합이 잘 맞지 않는다. 아마 불안과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불안을 야단쳤을 거다. 불안씨, 여기서 이렇게 튀어나오면 안 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합니까, 죄송한 척이라도 좀 하세요! 황당한 상상을 하니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유리문을 열고 병원에 들어가니 너무 많은 사람이 소파에 앉아있다. 모자를 쓰고 올걸.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겠지만 내 걸음걸이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며 접수대로 향한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혼나는 기분.
오랜만에 왔더니 접수대에 앉은 직원이 4명으로 늘어났다. A4 용지 사이즈의 간이우울검사를 빠르게 끝내고 쭈뼛거리며 내밀었다. 숫자 5에 동그라미가 너무 많아, 스스로도 민망했다. 직원은 눈동자만 굴려 내 점수를 보더니, 간이정신건강검사지를 하나 더 건넨다.
익숙한 문항 95개가 줄지어 서있다.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전과는 다른 양상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늘 주인공은 나 하나, 조연이 둘이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조연이 되었다.
"주연을 빼앗긴 소감이 어떠신가요?"
"아! 좋습니다. 제가 바라던 바예요. 이대로 그냥 점이 되어 사라지면 좋겠어요. 아무도 절 모르고, 절 찾지 않으면 좋겠거든요."
"완전히 사라지면 슬퍼할 텐데요?"
"그런가요? 하지만 다들 이겨낼 거예요."
이십 분쯤 나 스스로와 이런 가상의 인터뷰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메모장 가득 빽빽하게 쓴 이천삼백자의 활자를 보고, 더듬더듬 내 상태를 설명했다. 길게 적은 이천삼백자를 읊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를 검열하는 또 다른 내가 천오백자 가량을 읽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에게 필요한 정보만 전달했다.
잠을 잘 못 자요. 식욕이 없어요. 살이 자꾸 빠져요.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죽음을 생각해요. 아뇨. 아주 구체적으로. 고양이를 창밖에 던지고 저도 뛰어내리고 싶어요. 어느 날은 철길 옆을 걷다가 거기에 뛰어들고 싶었어요. 자해는 안 해요. 자해 생각이 들어서 병원에 바로 온 거예요.
"... 약을 처음부터 많이 쓸 거예요. 너무 몽롱하면 하늘색 약만 빼고 드세요. 약 남아도 힘들면 중간에 다시 내원하세요."
이 년 동안 천천히 두 종류로 줄었던 약이 다섯 종으로 늘어나는 데는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토록 나는 쉽게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