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가끔 그렇게 앉지만 의자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나이로 보면 입식 생활을 한지 오래되지 않은 나는 그렇다고 쳐도 젊은이가 그렇게 앉아 있는 걸 종종 보면 시선이 한참 머물게 된다. 사실 젊은이들은 침대에서 자고 식탁에서 밥 먹고 소파에서 TV를 보며 자랐으니 양반다리로 앉을 일이 거의 없었을 테니 의아한 모습이다.
아파트가 우리나라의 주거 문화로 정착된 지금은 어느 집 할 것 없이 입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식당에 가봐도 한식당이면 입식보다 좌식으로 앉게 되는 가게가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입식으로 바뀌어 테이블과 의자가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게 놓인 걸 볼 수 있다. 사찰은 종교의식 때문에 좌식으로 앉을 수밖에 없어서 젊은이들은 양반다리로 앉는 게 익숙하지 않아 종교활동이 어렵다고 한다.
인사만 해도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큰 절 문화가 사라져 버렸다. 요즘 인사하는 걸 보면 고개만 까딱할 정도로 하고 마는데 허리까지 굽히는 건 백화점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입식 생활문화는 우리 삶의 의식주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一人一房일인일방 시대
예전에는 집은 작고 식구는 많아서 방을 한 사람이 독차지하는 경우는 힘들었다. 안방마저도 엄마 아버지의 방이 아니라 거실, 식당, 객실의 기능으로 다목적실로 쓰였다. 형제가 둘셋이 한 방을 쓰는 건 예사였고 심지어 방 한 칸으로 온 가족이 같이 살던 시절도 있지 않았던가?
방 하나를 몇 명이 쓸 수 있을까? 사실 침대가 없으면 누울 자리만 있으면 몇이라는 수는 제한이 없었다. 침구를 깔면 침실, 상을 펴면 식당이나 공부방이니 집이 작아도 열 가족이 살아도 불평불만 없이 잘 만 살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어떤가? 안방은 더블베드, 다른 방은 싱글베드가 방을 차지하고 있으니 침대 수만큼 집을 쓸 수 있는 식구가 제한된다. 방의 크기가 제한되어 있는데 침대 크기를 줄일 수 없으니 방에 책상과 작은 옷장이 들어가면 꽉 차고 만다. 침대는 과학이나 가구가 아니라 방을 지배하는 권력자나 다름없다.
아파트의 정원은 네 명이다. 아이가 셋인 집은 어떻게 방을 분배해야 할까? 아파트 방 크기로 보자면 둘이 한방을 쓸 수 있는 나이는 몇 살까지라고 볼 수 있을까? 가구가 일상생활을 제한하는 이런 폐해를 아이 셋 키우는 집은 어떻게 극복하는지 모르겠다.
거실을 보면 알 수 있는 그 집의 주거 문화
거실은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생긴 신식 주거 공간이다. 아파트에 살기 전에는 우리가 사는 집에 거실이 따로 없었고 안방 앞에 마루가 있는 정도였다. 마루와 연결된 안방은 네 짝 미서기 문으로 되어 있어서 문을 들어내면 큰 공간으로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옥의 사랑채가 방과 마루가 분합문을 들어 올리면 큰 공간으로 쓰게 되어 있는데 우리네 전통 주거가 이어진 흔적이다.
아파트로 우리 주거가 보편화되면서 집의 각 공간의 융통성은 사라져 버렸다. 가구를 들이면 잡 자는 곳, 밥 먹는 곳, TV 보는 곳으로 각 공간의 용도가 한정되어 버리고 만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가 한 집에서 살기 어렵고, 손님이 와도 하룻밤 묵어가기가 마땅치 않다. 딱 네 식구만 살 수 있도록 규정되듯 공급되는 아파트에 길 들여져 삼대가 한 집에서 사는 집이 거의 사라져 버렸고, 우리 식구 외 다른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없어졌다.
집집마다 거의 똑같은 거실의 풍경은 TV가 있는 벽면으로 소파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거실의 주용도는 자동으로 'TV를 본다'이다. 그럼 식구들은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지 않은가? 일방향 소파가 바꿔버린 우리네 주거 문화는 TV만 쳐다보며 살게 되니 식구끼리 대화 없는 삶이다.
싱크대 옆에 식탁이 있긴 하지만 아침을 거르는 집이 대부분이라 쓰임새가 무색해졌다. 식구라는 말도 밥을 같이 먹을 일이 드문 집은 가족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옳다. 아침밥을 먹는 집은 그 때라도 말을 주고받게 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소파를 두지 않고 TV 없이 멋들어진 테이블을 들이는 집이 있다. 대화를 나누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집이다. 큰 테이블에서 책도 읽고 아이들은 공부도 하고 차나 와인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는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이다. 거실에 TV 없이 살면 식구로 살게 되니 매일 행복한 일상이 보장되는 집이 된다.
소파를 두어도 바닥에 앉던데
소파가 있는 거실이라도 방바닥에 앉을 일이 많은 집이 있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다 보니 소파를 두고 벽에 TV가 있어도 좌식 생활을 즐기는 집은 식구들이 대화를 자주 나눈다는 얘기이다. 입식 생활과 좌식 생활의 주거 문화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온돌 바닥이 주는 정서는 마주 앉는 자리가 편하다는 것이다. 상을 펴고 마주 앉으면 몸과 몸이 가깝게 되어 친근한 정서가 만들어진다. 의자는 간격이 정해지지만 방바닥에 퍼질러 앉으면 무릎도 닿고 어깨도 맞대게 된다. 아무리 혈육 간이라고 해도 몸을 부대끼며 지내야 정이 들기 마련이다.
겨울에는 소파에서 내려와 홑이불을 덮고 앉아 지내는 집이 많다. 온수온돌로 데우는 바닥의 온도가 미지근하면 전기매트를 깔아 따끈한 열기가 엉덩이에 닿는 걸 좋아한다.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은 좌식 생활에 어울리는 말이다. 온몸을 따끈한 바닥에 깔고 누워 있으면 노곤해지니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면 그만한 휴식이 없다.
의자에 앉아도 양반다리를 하는 건 습관이 아니라 유전자로 물려받은 한국 사람만의 특징이다. 만약 외국에서 의자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100% 한국 사람일 것이다. 가구 없이 살았던 우리의 전통 주거 문화와 가구를 들인 집에 살게 된 이 시대의 아파트 문화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의자에 앉아 한 번도 양반다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유전자가 달라진 새로운 한국인이라 할 것이다. 어느 세대에서 유전자가 끊어질지 모르지만 꼭 지켜내야 할 한국인의 속성을 잃게 되는 슬픈 일이 아닐까 싶다. 이불을 함께 덮고 발바닥을 비비며 깊어가는 겨울밤이 늦은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던 우리의 정서는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