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자랑하려면 밥부터 사라고 한다. 매일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선배는 과년한 딸이 둘이나 있지만 아직 미혼이다. 친구들도 큰 아이는 거의 결혼을 시켰지만 아직 손주를 봤다는 소식이 없다. 손주를 본 사람이라도 가까이 살지 않으면 영상통화로 하면서 눈요기에 그치고 만다. 그러니 내 손주가 온갖 재롱을 부리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얘길 맘 편하게 할 상대를 찾기가 어렵다.
우리집은 주말이면 손주를 만날 수 있다. 가끔 우리가 딸네 집을 찾기도 하지만 손주가 할머니가 지은 밥을 너무 좋아한다는 핑계로 거의 우리집을 찾아온다. 딸이 육아와 일을 병행하다 보니 피곤에 절은 몸을 조금이라도 쉬기 위함이다. 덕분에 우리는 제 엄마 아빠보다 우리를 더 좋아하는 두돌배기 손주와 지낼 수 있다.
한주를 걸러 보기도 하지만 삼대가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며 밥 먹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사라진 우리네 일상에서 자식과 가까이 살면서 주말이나 휴일을 손주와 함께 하는 건 누구라도 바라는 행복이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라는 집의 얼개가 한 집에 삼대가 함께 사는 건 너무 불편하다고 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냥 한 끼 밥만 먹으면 가기 바쁘니 하룻밤 자고 가도록 습관을 들여야 며느리나 사위뿐 아니라 손주도 가족의 정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손주가 우리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하자고 하는 말 "할아버지 차 마실까요"
손주 자랑하려면 왜 밥부터 사야 하나요?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던 시절, 우리가 아파트에 살기 전에는 혼례는 몰라도 장례까지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집에서 다 이루어졌다.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식구 대여섯 명은 기본으로 한 집에서 지냈고 삼대가 함께 사는 집도 많았었다. 멀리서 손님이 오면 당연히 어머니는 안방을 내주시고 집에서 묵어가는 건 우리 집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집에서 당연하게 했었던 일이 아파트에 살게 된 요즘은 아예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아파트라는 집의 일상은 잠자고, 씻고, 옷 갈아입는 정도의 개인적 기능만으로 한정되어 버렸고 그 나머지 사회적 기능은 퇴화되어 가고 있다. 집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회적 기능이 카페나 술집, 음식점과 숙박시설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파트 살이’는 집이라는 기초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려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 잃어버린 집의 사회적 기능을 되찾아 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파트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가 없는 집이라 가족 구성원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못해 식구의 이탈이 일어난다고 본다. 아이들은 대학생만 되면 독립을 서두르고 부부 간에도 각방을 쓰는 집이 많아지고 있다. 집이 삶을 담아내지 못하면 사람들이 밖으로 나돌게 된다.
집에서 사회적 역할이 살아나야만 물리적인 집(house)이 아니라 정서적인 집(home)이 될 수 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집 안을 꾸미고 고급 주방기구와 식탁, 값비싼 소파가 있다고 해서 식구들을 집에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건 아파트에 살면서 충분히 알게 되지 않았는가? 개인의 공간과 사회적 공간이 잘 구분되어야 '우리집'은 식구들뿐 아니라 손님들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역할이 살아있는 집이라야 house가 아니라 home이 될 수 있다
가족 중 누구의 손님이라 하더라도, 아무 때고 찾아올 수 있는 집, 손님과 식구들이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사회적 기능이 살아있는 ‘우리집’이 된다. '내 집'이 아니라 '우리집'은 부부만이 아니라 손주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웃음이 담장을 넘는 집이다. ‘우리집’이라면 가장 작은 사회로서의 공동성이 살아있어야 일상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생겨나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잃게 된 ‘우리집’의 정체성을 다시 일깨워야 하겠다. 누구든지 집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집은 행복이 솟아나는 샘과 같으니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집을 돌보아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산다. 바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집에서 지내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다. 바깥에서 잠시 볼 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이다.’
- 이갑수 산문집 '오십의 발견’
밤이 이슥해졌는데도 불이 켜지지 않은 집이 자꾸 늘고 있다. 집이 있는데도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언제쯤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수십 억짜리 집을 자랑하는 사람, 그런 집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그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인 집’은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