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교육 환경을 걱정하며
나는 고등학교를 1978년에 졸업했다. 고등학교에서 받았던 교련 수업을 대학교에 다닐 때에도 받았다. 군부 정권에서 민주 정권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나의 성장기였다.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사회 분위기는 나라에서 학교, 가정까지 縱的종적 질서 체제가 엄격하게 지켜졌다.
가정교육에서 학교교육까지 교육의 목표는 오로지 이 종적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적 체제는 위아래가 분명해서 아래에서 위로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는 건 바로 항명으로 치부되기 마련이었다. 교육은 어겨서 안 되는 명령이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처벌로 이어졌다.
그 시대의 교권은 軍權군권이었고 스승의 말씀은 軍令군령과 다름 아니었다. 교실은 자주 교사의 폭언과 폭력으로 공포 분위기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소위 문제 학생으로 지목된 친구들은 교무실로 불려 가서 매질과 주먹질로 훈계를 받았지만 교육의 방편일 뿐이었다.
아마도 7080 세대까지는 이런 교육 체계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 이후의 세대들도 상당한 시기까지 폭력적인 교권 아래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교련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교련 선생님이 주로 악역을 맡았고 그 이후에도 학주라고 부르는 학생주임은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학창 시절의 기억이 추억처럼 아련한데 이젠 교사들이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고등학생이 교사에게 맞선다는 얘기는 얼핏 듣고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생이 선생님에게 그런 행동을 한다니 믿을 수가 없다. 거기다가 학부모는 한술 더 떠서 담임선생님에게 협박에 가까운 항의를 시도 때도 없이 저질렀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 앞에 그제야 우리 사회의 문제라며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君師父一體군사부일체,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고 했던 스승의 자리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교사나 교수가 노조를 만든다고 할 때 우리 사회는 스승의 자리가 노동자냐고 하면서 차가운 시선을 보냈었다.
아버지의 자리가 사라지면서 가정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스승마저 제 위치를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어떤 질서 체제로 유지될 수 있을까? 가르침과 배움은 그 위치가 분명히 위아래로 정해질 수밖에 없다. 교사를 교육의 공급자로, 학생을 그 소비자로 보고 소비자의 권리만 내세우는 게 학생인권조례가 아닌가?
내년에 유치원생이 되는 손주를 두고 딸이 몬스터라고 부를 때가 있다. 내가 볼 땐 의젓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손주지만 일상에서 제 엄마에게는 엉뚱한 행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손주가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는 의사소통을 지시가 아닌 동의를 구하며 키우고 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릴라치면 목소리를 높여 훈계를 해서 ‘우리집의 질서’에 참여하도록 하는 게 딸과 사위의 자식 교육 방침이라고 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흙탕물로 만들고 만다. 내 아이를 어떤 부모가 웅덩이를 흙탕물로 만드는 미꾸라지라고 보겠는가? 그렇지만 스무 명 정도 되는 학생이 함께 공부하는 교실에는 미꾸라지 같은 학생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누구라도 그 교실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책임지는 선생님이라면 흙탕물을 일게 하는 학생을 어떻게 제재해야 할까?
선생님과 학생, 선생님과 학부모의 자리는 결코 같은 위치에 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자리와 배우는 자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제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내려다보며 막말을 일삼는 학부모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했던 옛날의 교육 환경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