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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관 Jul 08. 2024

우리 시대의 가문, 가풍, 가장이 있는 ‘우리집’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단독주택인문학 3

요즘 가문(家門)⦁가풍(家風)⦁가장(家長)이라는 이 말들은 잘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의미마저 사전에나 있는 死語사어로 전락해 버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되고 만 건 아마도 삼대가 한 집에 살았던 대가족 제도의 붕괴에 따른 게 아닐까 싶다. 더 넓게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상하관계를 따지던 종적 인간관계가 무너지면서 가정도 가족 해체에 들어가게 된 것일 터이다.     


삼대가 한 집에 살았던 시절에는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기초교육이 가정에서 이루어졌었다. 사실 대화가 아니라 가장의 일방적인 훈시였지만 그 당시 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에 벗어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면 “네 아버지가 누구냐?”, “어느 집 자식이냐?”는 말을 들어야 했었다.      

   

가문은 '우리집'이라는 소속감  

    

예전에는 집안에 대대로 이어 오는 풍습이나 예의범절을 중심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정교육이 이루어졌다. 이젠 집이라는 사회의 기초 구성체가 흔들리면서 가정교육 없이 이루어지는 학교교육은 뿌리 얕은 나무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학교 교육마저 입시 학원처럼 대학 입학을 목표로 가르치고 있으니 아이들은 도덕이나 예절을 어디에서 배워야 할까?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집의 얼개로 말미암아 삼대가 한 집에 살기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는 어른이 없다시피 하니 우리집이라는 소속감마저 사라져 버렸다. 부부가 맞벌이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다 보니 집에서 밥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가족은 있어도 식구는 없는 셈이 되었다. 밥을 먹지 못하는 집은 대화가 없어지고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감도 옅어지고 있다.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현판, 집이름이라 할 수 있는 당호는 가문과 가풍을 짐작할 수 있다


교육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얼’을 심어주는 게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입시교육에 치중해 지식만 주입하는 요즘 학교 교육으로는 삶의 기본 소양을 채우지 못하니 얼빠진 사람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밥상머리에서 받았던 가정교육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얼’을 체득하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얼'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정신의 줏대라고 되어 있다. 얼빠진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맹한 사람을 이른다.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 있어서는 안 될 사건, 사고들이 계속 늘어나는 건 가정교육을 받지 못해 얼빠진 사람들이 늘고 있는 때문이 아닐까?      


가풍은 '우리집'만의 자존감   


생뚱맞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가정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원인의 하나로 ‘이 시대의 집인 아파트’를 지목해 본다. 주로 반가(班家)에 해당되는 얘기지만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그 가문만의 가풍을 담아서 가장이 기획하여 지었다. 옛집의 설계자는 그 집안의 가장이었던 셈이다.      


결국 옛날에 지은 집은 가장이 가문의 가풍을 담아낸 결정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본다면 그 집에서 사는 것만으로 그 집안의 가풍이 담긴 ‘얼’을 체득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집을 짓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사람을 만든다는 윈스틴 처칠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필자가 설계해서 지은 단독주택 양명재, 집 안에 가득한 남향 햇살처럼 밝고 생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염원을 담았다 

         

이 시대의 주거를 대표하는 아파트는 한마디로 얼빠진 집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를 ‘우리집’이라며 애착을 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파트는 가정이라는 정서를 담기가 어려우니 ‘얼’이라고 부를 그 무엇도 얻어지기가 어렵다. 우리집을 지어서 산다는 의미는 '얼'이 담긴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가족애에 대한 욕구의 반영이라고 본다.     

     

우리 식구들과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우리집을 지어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 식구라는 정체성, 즉 남과는 다른 '얼'이 담긴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가족애에 대한 마음을 함께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풍’이라고 거창하게 얘기할 필요 없이 ‘우리집’이라는 정체성을 식구들이 공유하자는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은 보스가 아니라 리더    


우리집을 식구들이 함께 살면서 행복해질 집으로 지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파트를 잘 살펴보면 부부, 아니 한 사람의 권력자를 위한 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부부만 사는 집에 각방을 쓰는 건 지금의 주거 생활에서는 보편적인데 안방을 쓰는 사람이 보스이다.

    

보스가 군림하는 집은 식구들이 낱낱이 흩어진다. 그렇지만 리더가 앞장서는 집은 한 식구로 자주 모인다. 누구라도 앞장서서 식구를 챙기는 사람이 리더로서 가장이 될 수 있다. 리더가 있는 집을 짓는다면 어떤 얼개를 가지게 될까?


필자 설계 중인 상가주택 3층의 단독주택, 건축주 요청이기도 했지만 안방을 없애고 모든 방이 평등하게 되어 있다. 건축주는 아이들이 먼저 방을 정하고 남은 방을 쓰겠다고 했다


물론 우리집이라는 의미를 설계자가 제안할 수는 있지만 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이라는 식구들의 삶을 채워 넣는 설계로 집을 완성하는 게 설계자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시절의 ‘보스형 가장’은 이미 사라졌지만 ‘리더형 가장’은 꼭 있어야 한다. 우리집이라는 가장 소중한 사회-공동체에 가장이 없다면 선장 없이 항해하는 배와 무엇이 다를까?     


아파트에서 안방의 주인이 식구들의 가장이라면 공간을 점유하는 분위기에서 ‘리더형 가장’의 자격에서 탈락이다. 리더는 군림하는 위치가 아니므로 집을 쓰는 처지도 다른 식구들과 다름없어야 한다. 식구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짓는다면 당연히 안방이라는 말부터 없어져야 한다.    



        

집을 짓기 위해 설계를 의뢰하기 전에 우리 식구들이 ‘우리집’이라는 소속감을 함께 할 ‘얼’을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그 집이 다시 사람을 만든다고 한 처칠의 말씀을 새겨보며 '얼이 담기는 집이란?' 화두를 풀어내듯 식구들과 고심해 보아야겠다.     


가정교육은 식구들과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지면 좋겠다. 식구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집이라는 이 시대의 가문’이 살아날 것이다.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집만의 정체성이 공유되는 가풍’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또 엄마가 되었던, 아빠가 그 역할을 하던 '리더로서 앞장서는 가장의 역할'이 식구들이 우리집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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