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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로스엘 Jan 24. 2022

그린이, 거린이, 가린이

나의 나무 친구들

  

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인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나무를 좋아했다. 비 오는 날 나무 이파리들의 초록초록한 싱그러움이 좋았고, 여름엔 기분 좋은 서늘함이 느껴지는 나무 그늘이 좋았다.


  그렇다고 나무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거나 특별히 공부를 한 건 아니다. 사실 나무 이름도 몇 개 알지 못한다. 주변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그냥’ 다 좋았을 뿐이다.


  제일 좋아했던 나무는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었던 플라타너스다. 일단 이름이 멋있었다. ‘플라타너스’라고 발음을 하면 입 안에서 혓바닥이 경쾌하게 구르는 듯하면서 뭔가 굉장히 멋있고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어른 손바닥을 훌쩍 넘는 큰 잎사귀도 좋았다. 플라타너스 나무 잎사귀 사이사이로 조각조각 비치는 햇살이 어찌나 예쁘던지.


가을의 플라타너스. 꼭 푸르러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나중에 안 사실은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나무라는 것이다. 열매의 털이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기도 하고 생장이 너무 빨라 순식간에 커져 주변 도로를 망가지게 한다나. 그런 이유로 많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베어지기도 했다고 들었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넉넉하고 넓은 품을 가진 플라타너스 나무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었다. 내 방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면 아파트 화단의 풀들과 나무들이 보였다.


  비가 오던 어느 날, 감상에 젖은 나는, 내 방 창문에서 가장 잘 보이는 소나무 세 그루에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소나무들의 이름은 ‘그린이, 거린이, 가린이’다.


  가장 초록색이 짙었던 소나무는 영어의 ‘green’에서 이름을 가져와 ‘그린이’. 가장 키가 컸던 소나무는 거인처럼 크다는 의미로 ‘거린이’. 마지막으로 ‘가린이’라는 이름은 그중에서 가장 가냘파 보여서 '가냘프다'의 '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름만 붙이고 끝난 게 아니었다. 직접 멜로디를 만들고 그 멜로디에 맞게 가사를 써서 짧은 노래까지 만들었다. 앞부분 가사는 아쉽게도 지금 정확히 기억이 안 나고 뒷부분 가사만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린이, 거린이, 가린이~ 모두 모~두 나의 친구죠...”


  지금 생각하면 어린 꼬마 초등학생이 감수성이 참 풍부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이라는 책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 책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책 속에서 주인공 앤도 감수성이 충만한 소녀로 나무를 무척 사랑했다. 집 앞에 있던 벚나무의 꽃들이 마치 눈처럼 희다고 ‘눈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던 앤.



  어느덧 40대의 중년이 되어 버린 나. 매일 일하느라 집안 돌보느라 정신없이 살면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부족해졌다.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 주며 다정하게 대화하고 노래까지 지어주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아주 오랜만에 길가의 작은 나무에게 인사를 건네며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한다.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과 맑았던 시절을 다시 떠올리면서.


  “안녕, 나무야. 그동안 이 길을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인사 한번 제대로 못 건네서 미안. 앞으로는 자주 눈도 맞추고 이야기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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