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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로스엘 Feb 19. 2022

잃어버린 낭만 세포를 찾아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며 든 생각

(드라마에 대한 스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있다. 남주혁과 김태리가 주연으로 나오는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다.      



  남주혁은 원래 내겐 눈에 띄는 배우가 아니었는데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를 보고 팬이 되었고, 김태리는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에서 처음 보고 좋아하게 된 배우다.  두 사람이 주연을 한다니 재미있겠다 싶어서 보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IMF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라 전체가 힘들었던 그때가 기억났다.



  

  백이진(남주혁)은 원래 재벌가의 맏아들이었는데 IMF가 터지면서 졸지에 가난뱅이가 되어 버렸다. 다니던 대학도 휴학을 하고 혼자 단칸방에서 살면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한다. 집이 다 망해 버리면서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심지어 빚 때문에 부모님은 위장 이혼까지 한 상태다.     


  나희도(김태리)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펜싱부 소속이다. IMF로 인해 자신의 학교에서 펜싱부가 없어져 버리자 펜싱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까지 갈 정도로 적극적이다. 만화 풀하우스(풀하우스라니! 추억이 돋는다.)의 애독자로서 늘 책 대여점에 가서 빌려 보는데 백이진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아는 사이가 됐다(이 전에 신문 배달을 하는 백이진과 첫 만남을 가지긴 했었다).      


  어느 날, 백이진을 찾아온 두 남자를 나희도가 우연히 보게 된다. 그 사람들은 백이진의 아버지인 백 회장의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 두 사람은 백 회장에 대한 원망을 아들인 백이진에게 모질게 퍼붓는다.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는 백이진. 그 모습을 지켜본 나희도. 나희도는 백이진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자신이 항상 기분이 좋아지는 장소로 데리고 간다. 그곳은 다름 아닌 나희도가 예전에 다니던 고등학교의 수돗가.      


  나희도는 어리둥절해하는 백이진을 끌고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로 가더니 갑자기 수도꼭지를 하늘로 향하게 돌려놓고는 물을 튼다. 거꾸로 솟은 수도꼭지를 따라 물은 하늘을 향해 분수처럼 치솟고, 나희도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어때? 신나지? 기분 엄청 좋아지지 않아? 나 이거 보고 있으면 행복해져.   

  


  처음에는 굳은 얼굴로 잠자코 지켜만 보던 백이진이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하나 갖고는 별로 안 행복한데.  


  그러면서 수돗가에 있던 모든 수도꼭지를 하늘 방향으로 돌려놓고는 동시에 물을 튼다. 그렇게 수돗물로 신나게 분수놀이를 하며 마침내 웃음을 되찾게 된다. 


  여름밤의 시원한 물줄기 속에서 너무나도 예쁘고 풋풋한 두 청춘의 모습이 어우러져 싱그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수돗가에서 분수놀이를 하는 두 사람




  두 배우의 감정 선을 따라 안타까운 마음, 설레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드라마를 보다 이 장면에서 생뚱맞게 든 생각 하나.     


  ‘아우, 물을 저렇게 다 틀어 놓으면 너무 아까운데...!’     


  두 배우의 아름다운 감정이 그야말로 하늘로 힘차게 솟는 물보라들처럼 팡팡 터지고 있는 장면에서 무미건조하면서도 눈치 없게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을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머릿속에서 튀어 오른 것을 도로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내가 이런 로맨틱한 장면을 보면서 기껏 한다는 생각이 물이 아깝다는 거라니...! 믿을 수가 없네.’     


   그렇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평소에는 물을 절약해야 한다고 남편과 아들에게 끊임없이 외치고 다니지만(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물 틀어놓고 양치질하기이다.), 적어도 로맨틱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까지 이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너무 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나에게 이상이 생긴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낭만 세포가 큰 폭으로 감소를 하거나 세포의 기능이 크게 떨어졌다고 밖에는 진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작년에 건강 검진을 받았을 때 내 백혈구 가 그 이전 해에 비해 반으로 줄어 백혈구 감소증이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다행히 지금은 무슨 특별한 치료를 받은 것도 아닌데 백혈구 가 정상 수치로 돌아온 상태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내 낭만 세포도 다시 예전처럼 활성화가 되든지 그 수가 늘어나든지 하겠지?


  어쨌든 요즘 내가 뭔가 예전에 비해 감정이 메말라졌다고 느낀 것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빨리 나가서 좀 돌아다녀야겠다.”라고 처방을 내린다. 내가 너무 집에만 있어서 그렇다는 게 남편의 진단 결과였다.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감정도 메마르고 낭만 세포도 제 기능을 못하는 거라고(혹은 감소한 거라고.).      


  듣고 보니 일리가 아예 없는 말도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추운 날씨와 미세먼지 때문에 집에서만 생활한 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봄의 기운이 꿈틀대고 있는 진짜 땅을 밟고, 자연이 공급해 주는 공기를 마시며 걷기라도 해야겠다. 조만간 ‘나의 장소’인 덕수궁 돌담길에도 꼭 가서 제대로 충전을 하고 와야지.     


  몸은 하루하루 늙어가더라도 마음만은 영원히 늙고 싶지 않다.


봄아, 빨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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