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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로스엘 Feb 21. 2022

'아줌마'와 친해지기

이제는 친해지고 싶은 호칭

  우리 중학생 아들이 매우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바로 ‘야’라는 말이다. 친구들이 부르는 건 그래도 괜찮다는데 엄마나 아빠가 그렇게 부르는 건 질색한다.     


  “야, 밥 먹어.”     


  얼마 전에 식사 준비를 끝내고 무심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가 어김없이 한소리를 들었다.  

   

  “엄마, ‘야’가 뭐야.”

  “아, 미안. 그런데 엄마가 아들한테 ‘야’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안 좋은 거야?”

  “그래도 ‘야’는 너무 심했지.”     


  아들은 엄마나 아빠가 ‘야’라고 부르면 너무 쌀쌀맞고 냉정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자기 이름을 부르거나 애칭을 부르게 한다.


  우리 아들에게는 애칭이 많다. 예를 들면 ‘뽀실이’도 그중 하나. ‘뽀실이’는 ‘뽀뽀를 부르는 토실이’의 줄임말이다(이젠 더 이상 토실토실하지 않지만.).


  이런 걸 보면 아직은 사춘기가 제대로 오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도 듣기 싫은 호칭이 있다. 듣기 싫은데 너무나 나와 어울리는 호칭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아무리 듣기 싫다 해도 사회적으로 나는 이미 그 호칭과 일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떼려야 뗄 수가 없고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도 없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맞다. ‘아줌마’라는 호칭이다.     




  내가 처음으로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40대 때도 아니고 무려 30대 때였다.      


  그때 나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어떤 꼬마가 나에게 “아줌마!”라며 말을 건 것이다.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 되는 남자아이였는데 출구 방향을 잘 몰라 나에게 질문을 했던 거였다.      


  처음에 등 뒤에서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것이 나를 부르는 것인 줄 몰랐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는데, 다시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남자아이가 바로 내 뒤에 서 있었다.     


  “아줌마, O번 출구(몇 번 출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또랑또랑하고 씩씩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했던 그 아이는 자신이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겼는지 아마 상상도 못 했겠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난 그 당시에 아줌마가 맞았다.      


  사전에 보면 ‘아줌마’라는 말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1.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
2. 어린아이의 말로 ‘아주머니’를 이르는 말.

- 표준국어대사전 -     


1. 나이 든 여자를 가볍게 또는 다정하게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
2. 결혼한 여자를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

-고려대한국어대사전-


  결국 그 아이는 그 아이의 관점에서 충분히 ‘나이 든 여자’인 나를 향해 ‘아줌마’라고 부른 것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도(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주관적일 수 있으니까) 나는 ‘결혼한 여자’였기에 매우 적확한 호칭을 사용한 거라고 볼 수 있다(만약 그 아이가 나에게 예의를 갖춰 ‘아주머니’라는 더욱 공손한 호칭을 사용했다면 아마 나는 더 큰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당연한 것임에도 나는 그 사실을 수용하지 못했다. 이제는 40대가 되어 빼도 박도 못하는 ‘아줌마’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그 호칭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나 이제 진짜 아줌마야.’라고 말하는 것은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아줌마’라고 부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은... 아직 온전히 ‘아줌마’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줌마’라는 말의 어감이 다소 부정적인 것도 그 호칭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사전에는 ‘나이 든 여자를 가볍게 또는 다정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지만, 왠지 '다정한' 느낌으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 데다가 교양 없고 성격이 세며 외모적으로도 꾸미지 않는 여자’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할까.


  드라마나 영화 같은 곳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골 장면들만 봐도 그렇다.      


  “아니, 이 아줌마가 어디서 막말이야?”

  “뭐라고? 아줌마? 아줌마라고?!! 내가 어딜 봐서 아줌만데!!!”     


  뭐 이런 레퍼토리로 말다툼을 하다 결국엔 서로 머리를 쥐어뜯고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를 자주 봤다. 아줌마를 상대하는 쪽은 아줌마라고 공격을 하고, 듣는 여자 쪽은 왜 자기한테 아줌마라고 하냐며 소리를 지른다.     




  우리 아들이 엄마나 아빠로부터 ‘야’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건 충분히 반영해 줄 수가 있다. 우리 아들의 엄마, 아빠는 이 세상에 각각 한 명뿐이니까. 합쳐봤자 고작 두 명만 신경 쓰고 고쳐주면 된다.


  그런데 내가 듣기 싫어하는 ‘아줌마’라는 호칭은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저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겐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일이 없다. 그러나 나를 모르는 불특정 다수로부터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탁하기에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차피 내 성격 상 애초에 그런 부탁을 할 만한 깜냥도 없지만. 

     



  이제는 ‘아줌마’라는 말을 겸허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진작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지나친 현실 부정은 내 삶에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정리가 되었다(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

       

  나 스스로 괜히 ‘아줌마’라는 말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만 덧입히지 않으면 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그리고 그저 그 순리를 따라 내 나이의 모습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육체의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나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젊고 건강하다나이들어 가는 것조차 나의 소중한 모습 중 하나로 인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아줌마'가 된 이상,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냥하게 웃어줄 수 있는 '행복한 아줌마’가 되고 싶다.         




  남편에게 이런 나의 기특한 결심을  말했더니 "근데 당신은 아줌마라는 말이 안 어울려."라고 한다.


  빈말이라고 해도 그 얘기에 은근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아줌마'라는 말과 진짜 친해지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만약 남편이 "그래, 잘 생각했어. 이젠 받아들여야지."라고 말했다면 난 분명 삐졌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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