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돈의 가치?
9년을 대기업에서 일을 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받은 돈은 적다고 하면 적은, 그러나 또 많다고 하면 많은 돈이었다.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9년 동안 했던 것도 바로 이 돈 때문이었다. 회사는 나에게 내가 하는 일보다 많은 돈을 주었고, 나는 그 돈에 현혹되어 수동적으로 주어진 업무를 해나갔다. 한계에 다다랐을 쯔음 박차고 나왔을 때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받는 돈이 얼마나 큰 것이었고 그렇게 번 돈이 얼마나 가치 없었던 것이었는지. 그곳에서 번 돈은 그저 한 달을 살아가는데 쓰였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돈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하는 것이 아닌 내가 돈을 위해 일을 하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남편의 월급으로 한 달을 살아가기 위해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렸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된 만큼 그에 맞춰 온 가족의 씀씀이는 줄었지만 고정지출 때문에 여간해서 한 달을 살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한 푼이 아쉬웠다.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이가 유치원에 가있는 10시부터 3시. 5시간 정도였다.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굉장히 제한적이다. 외부로 일을 하러 가기에도 이동시간을 생각하면 무리가 있다. 더군다나 나는 기존의 일을 경력 삼아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발적 경력단절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무튼 0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알아보았지만 그러기엔 나이가 또 많다. 결국 찾아낸 건 집에서 할 수 있는 이른바 재택 아르바이트. 다행히 AI 시대를 위해서는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인간의 막일 같은 작업들이 굉장히 많이 필요했다. 조금만 익히면 금방 할 수 그리고 최저 시급에 약간 못 미치는 페이를 받는 일이었다. 물론 숙달돼서 한 시간에 처리해야 할 일을 30분에 처리하면 최저 시급보다 2배는 받는 거겠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이 일을 하면 내 손에 들어오는 건 하루에 3만 원 정도이다. 기간은 한 두 달이면 끝날 일이고 내가 하루에 한 만큼 양으로 돈을 받으니, 아이를 옆에 두고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또다시 돈을 위해 일을 했다. 분명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케어하고 하고 싶었던 것도 좀 하면서 거창하게 말하면 미래를 위한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기존의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일을 하면서도 들어오는 돈은 턱없이 적었다. 많이 할수록 커리어가 생기는 일이 아니라, 그저 단순 업무의 반복이고 시한부 아르바이트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동은 무엇일까. 그렇게 요일 바뀌는 것도 모르게 아르바이트를 하다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돈을 겨우 포기하고 얻은 귀중한 나의 시간이었지만 결국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기분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테지. 일 하고 남는 시간을 아끼고 또 아껴 자기를 위해 쓰면서 말이다. 노동의 가치보다 나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시간이 나에게 필요하다. 꼭 필요한 그 시간을 돈에게 양보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