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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Jan 12. 2024

엄마의 빨간 티코

엄마가 운전하던 시기가 있었다. 엄마 나이 40대 중반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이야기다. 엄마는 필기와 실기를 골고루 여러 번 떨어진 뒤 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지금이야 여자 운전자가 많지만 아빠가 말하길 그때는 동네에 운전하는 여자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그 많지 않은 여자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9인승 봉고차가 있었다. 키가 150센티미터인 엄마에게 그 차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운전석을 앞으로 바짝 당겨도 엑셀과 브레이크에 다리가 간당간당하게 닿았다. 면허는 땄으나 도로를 달리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운전을 가르쳐줄 상대는 아빠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전 연습을 하러 나가면 엄마와 아빠 둘 다 씩씩대며 들어왔다. 베테랑 운전자인 아빠에게는 엄마의 미숙함만 보였을 테다. 하지만 엄마의 운전 실력이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온 가족이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외출한 날, 하마터면 가족 모두 한날에 사라질 뻔했다. 엄마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커브를 돈 탓이었다. 차는 다리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멈췄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다급히 “브레이크, 브레이크!!!”를 외치던 아빠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딸들을 태우고 목욕 가는 중 앞차를 추월하려다 맞은편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할 뻔한 날도 있었다.      


과속하거나 신호등을 못 보고 지나쳐 경찰에게 잡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유, 한번만 봐주세요” 사정했지만 경찰은 당연히 안 봐줬다. 경찰에게 걸린 날이면 엄마는 며칠을 전전긍긍하며 우편함을 들여다봤다. 아빠 몰래 과태료를 내려는 심산이었다. 허나 이 계획은 대체로 실패했다. 아빠가 퇴근길에 우리 집 우편물을 직접 가져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빠는 우체국에 근무했다.


느리게 발전하는 운전 실력 탓에 엄마가 나갔다 오면 차가 흠집이 나거나 푹 패여 있었다. 봉고차가 점점 너덜너덜해질 무렵 아빠는 중고로 빨간 티코를 구해왔다. 엄마에게 여러모로 딱 맞는 차였다. 봉고를 타던 버릇인지 엄마는 티코를 탈 때도 의자를 바짝 앞으로 하고, 핸들을 밭게 잡았다. 가끔 사이드미러를 펴지 않고 도로로 나가기도 했다. 더 신기한 건 집에 돌아와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엄마는 용케 큰 사고 없이 친정에 가고, 시장도 가고, 목욕탕도 갔다.      


엄마의 빨간 티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날이 있다.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뜨끈한 방바닥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엄마가 오더니 슬며시 물었다.


“바다 보러 가지 않을래?“


그날 바다로 가는 길이 어떤 목적의 외출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 나와 달리 운전하는 엄마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한 시간쯤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조금 걷다가 한겨울 바닷바람이 너무 차서 근처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라면을 주문하자 신김치가 같이 왔다. 시큼한 김치의 맛으로 매운 라면 하나를 국물까지 싹싹 먹었다. 날이 추워 바다는 얼마 못 보고 라면만 먹고 다시 차에 탔다. 집으로 돌아오는 데 해가 어스름 지고 있었다. 노을과 비슷한 색이라 못 봤는지 엄마는 신호등의 빨간불을 쌩하니 지나쳤다. 다행히 사거리에 차가 없어서 우리는 무사히 집에 왔다.


그 뒤 대학을 타지로 오면서 기숙사에 들어갔고,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탈 일은 줄어들었다. 몇 년간 잘 타던 티코를 처분한 뒤 엄마의 운전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본연의 기능을 잃은 채 신분증으로만 쓰던 엄마의 면허증은 2023년 12월, 나라에 반납했다. 오래전 일이라 엄마가 운전하던 때가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턱이 아릴 정도로 시큼한 김치와 빨간불에 당당히 직진하던 엄마의 모습은 선명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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